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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회 리토피아청소년온라인백일장 심사결과

 

장원

김다영(운문, 광주 경신여고)-얼음

 

차상

운문부

나은비(경기 서해고)-창조하라

산문부

권복현(경북 성주여고)-꽃이 핀다는 것은

 

차하

운문부

최윤서(경기 가좌고)-목련

곽남경(경북 선영여고)-혼잣말의 진화

산문부

김명미(인천 부평여고)-기계인간

배송문(광주 수피아여고)-고민카페

 

 

장려

운문부

유효진(경기 고양예고)-아빠와 크레파스

김희성(경기 안양예고)-남미관의 태양신

조용화(경기 안양예고)-싱크홀

김은별(광주 송원여고)-전봇대에 박힌 옹이

산문부

현유림(대구 함지고)-지렁이

김찬미(인천 미추홀외고)-담임선생님께

김예나(경기 운정고)-도망자들

박진아(대구 이서고)-단상

김경민(경기 안양예고)-향기

 

심사

운문

예심/이외현(시인), 천선자(시인), 김보숙(시인), 정령(시인)

본심/강우식(시인), 장종권(시인), 백인덕(시인, 글), 권경아(문학평론가)

 

산문

예심/손영미(희곡작가), 박하리(수필가, 시인), 정치산(시인), 정미소(시인)

본심/강인봉(소설가), 유시연(소설가, 글), 김영식(수필가), 김영덕(문학평론가)

 

운문 심사평

현대인은 인류 진화사상 가장 똑똑하고 활달한, 말 그대로 ‘스마트(smart)'한 존재라고 한다. 그들은 먼 우주와 심해를 탐사하고 있고, 비약적으로 발전한 기술 덕분에 시· 공간의 거리를 거의 느낄 수 없을 만큼 빠르게 이동하고 있다. 그렇지만 언제나 변하는 것과 변할 수 없는 것에 대한 분별을 멈춰서는 안 된다. 집단지성으로서 인류의 진보는 더 가속화되겠지만, 지난 수 백 만년 동안 거의 변화가 없는 ’뇌‘라는 감옥에 갇힌 개인은 오히려 확대 심화하는 권태와 무력감의 늪으로 더 깊숙이 가라앉을지도 모른다.

예심을 통과한 작품들은 우리 고교생들의 지적 능력과 관심사, 성장 환경 등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결코 기쁘고 반갑다고만 할 수 없는 상황이 올 해도 지속되었다. 어쨌든 시란 관념적 이해에서 출발하기 보다는 생생한 체험적 사실에 근거 했을 때 더 큰 감동과 교감을 이끌어낼 수 있다. 소통되지 못하는, 즉 서로의 경험을 교환할 수 없는 작품이란 도대체 무슨 의미와 소용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상상력을 기발한 착상으로, 표현력을 시 짓는 이가 주체하지 못하는 어휘들의 진열로, 진정한 비판의식을 시적 대상에 대한 관찰과 깊은 사유를 거친 이해를 향한 태도가 아니라 분열, 해체하는 기술적 결과로 포장하는 글쓰기의 방법론들은 마땅히 폐기되어야 한다.

고교시절이 성장의 한 단계라는 점을 우선적으로 고려했을 때, 그 때에만 사용할 수 있는 어휘와 그 시절의 문제의식이 필요함은 두말 할 나위가 없다. 그것이 좀 미숙하고 소박하게 보일지라도 모든 거목(巨木)도 결국은 맹아(萌芽)에서 출발했음을 비추어 볼 때 위험하거나 두려워할 일은 아닐 것이다. 최윤서(가좌고)는 「목련」의 “다시 돌아온 시간 앞에서/왜소한 우주 하나가/처음 팽창이라도 하려는 듯/터뜨리는 봉오리/터져나오는 봉오리”처럼 익숙한 사물(꽃봉오리)을 새로운 시각(왜소한 우주)으로 보려는 시선한 태도가 시적 발전의 가능성을 예감하게 한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야간비행」의 1연과 7연처럼 인식이 변화 없이 시의 중심 제재가 전혀 상반되는 모습으로 그려지는 것은 아직 사고가 구조적으로 전개되지 못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이는 시 행과 연이 무질서하게 배치되어 있는 것으로도 반증된다. 곽남경(선영여고) 역시 「혼잣말의 진화」의 마지막 연, “나를 지우고 하루를/살아가는 사람들/그들 사이에 존재하는/어둠이 잠시 자리를 비운다.”라는 부분에서 잘 드러나듯이 ‘혼잣말’을 할 수밖에 없는 현대인의 초상을 적절한 시어를 사용해 형상화하고 있다. ‘가랑잎’과 ‘바람’의 관계를 줄로 조종되는 인형, ‘마리오네트’에 비유한 작품도 선명한 주제 의식과 함께 군더더기가 없는 그러니까, 언어의 경제성을 잘 살린 작품이다. 문제는 ‘주파’가 ‘추파’인지 ‘주파수’인지 불분명한 것처럼 가장 적확한 어휘를 선정하려는 노력을 조금 더 기울인다면 앞으로의 발전이 기대된다.

앞에서 힘주어 강조했지만, 지나치게 억세고 강한 어휘들, 분열시키고 해체하는 표현들이 시의 의미를 더해주거나 공감과 감동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독자들에게 시인의 생각을 강요하게 될 뿐이다. 이에 비추어 본다면 나은비(서해고)는 시작태도에 있어 아주 큰 미덕을 갖추고 있다 할 수 있다. 「창조하라」라는 작품에서 잘 드러나듯이 ‘창조’라는 한 단어가 ‘도끼’라는 도구적 의미에서 “땅을 죽이는 비”를 거쳐 “쥐를 잡아 뜯어먹는 비둘기”를 만드는 즉 ‘과학기술’이라는 의미에서 환경, 생태적 의미를 거쳐 ‘인간의 습성’ 자체에 대한 의문, “멈출 줄 모르는 인간은/이제 멈추지 말고 창조하라”는 데에까지 이르는데 억지가 없는 자연스런 흐름을 보여준다. 다만 「가로등」과 「착한 어린이」에서 드러나는 의식의 소박성은 문제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충분한 독서와 체험, 즉 정신적 성장을 통해 극복할 수 있는 문제이므로 앞으로의 성장이 기대된다. 시어의 활용과 주제 의식의 명료성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김다영(경신여고)은 상당한 수준의 작품들이었다. 「얼음」과 「귀농」은 두 작품 다 튼튼한 주제 의식을 기반으로 하여, 시어라는 것이 특별하게 일상과 분리된 어떤 미사여구가 아니란 것을 작품으로 증명하는 시적 활용이 돋보였다. 두 작품 다 우리 현실에서 흔하게 접하게 되는 ‘좌절과 소외’(‘이방인과 노숙자’)를 그리고 있지만 시적 화자가 함부로 개입하는 법 없이. 심리적 거리를 유지함으로써 어조와 태도에 있어 상당한 수준의 객관성, 결국 시인으로서의 자질을 보여준다. 바로 이러한 것들이 우리가 시적 기법을 배우고 사용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예심을 통과한 작품 모두를 다루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가볍고 발랄하기만 한 대중문화의 압력 아래서 이처럼 자기 자신과 타인인 우리, 즉 공동체를 생각하며 치열하게 고민하려는 작품들을 만날 수 있어서 반가웠다. 이들로 인해 우리 현대시가 더욱 넓고 깊어지는 때가 오리라 굳게 믿어 본다.

 

산문 심사평

예심에서 올라온 8편은 문장을 다루는 솜씨나 주제의식이 뚜렷해서 순위를 선정하기 위해 고심을 했다.

권복현의 「꽃이 핀다는 것은」, 「남겨진 발자국은」은 빼어난 수작이다. 꽃이 핀다는 건 어둡기만 했던 누군가에게 눈부신 희망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그 시선이 놀랍다. 또 다른 작품, 채 굳지 않은 시멘트 길 위에 남겨진 어린 꼬마의 발자국과 어른의 발자국. 어린 꼬마가 어른의 발자국에 자신의 발자국을 맞춰보는 장면에서 인간의 유한한 삶, 순환하는 회귀의 삶을 사는 인간의 법칙을 따스한 시선으로 보여준다. 앞서 간 할아버지의 발자국을 따라 가는 생의 법칙을 가족에 빗대어 표현한 부분이 보편적인 정서를 환기시켜서 따뜻하게 다가온다. 두 편 모두 사물을 인생에 병치시켜 잘 그려냈다.

김명미의 「기계인간」은 현대문명의 이기를 냉철하게 파고든 작품이다. 한 마디로 서늘한 소설이다. 인간의 본능과 욕망을 한 치의 동정도 연민도 없이 그렸다. 구성과 주제가 뚜렷해서 앞으로 문학적 은유가 풍부한 문장에도 고민해보기를 권유한다. 뭐든 할 수 있다는 인간의 욕망이 파멸로 이르는 이 작품은 바벨탑을 쌓으려는 인간의 오만이 결국에는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에 대한 경고를 보여준다.

배송문의 「고민카페」는 예약제 운영으로 고민을 들어주는 1인카페를 배경으로 한 액자소설이다. 사주카페처럼 차를 주문해 마시고 사람들의 고민을 들어주는 화자의 시각으로 그렸다. 개개인이 지닌 아픔을, 그 핍진한 세월의 간극을 차를 마시며 구어체 형식으로 풀어놓는 여자의 이야기가 잔잔하게 드러난다. 필자와 극중 인물 간에 적정한 거리감이 있어서 담담하게 표현된 점이 좋다.

현유림의 「지렁이」는 ‘지렁이노트’ 다섯 개의 챕터로 이루어져 있다. 시간을 생물에 비유한다면 살아 있는 게 맞다. 꿈틀거리며 느리게, 혹은 빠르게 흘러가는 시간을 개개인의 일상에 맞추어서 쓴 필자의 사유가 신선하다 못해 신성하다.

박진아의 「단상」은 문장이 안정되어 있다. 글을 많이 써 본 솜씨다. 제목은 좀 고민해볼 필요가 있겠다. 원죄의식에 대한 뚜렷한 주제의식이 돋보인다. 개신교도인 아버지와 가톨릭교도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고 성장한 앙드레지드의 ‘전원교향악’이 연상되는 작품이다.

김찬미의 작품들은 물 흘러가듯 유려한 문장이 돋보이나 나름 곳곳에 고민해야 할 부분이 있다. 이상과 꿈이 많은 여고생의 끼와 열정이 넘치다못해 과부하가 걸린 느낌이다. 문장은 좋으나 재능을 아끼라는 말을 하고 싶다. 거칠 것 없는 표현은 좋지만 절제된 언어, 필자와 글 사이에 거리두기가 필요하다.

김경민은 수필보다는 소설의 형식을 빌려서 썼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그 외 김예나의 작품도 눈여겨볼 만한 수준이다.

 

장원 수상소감

리토피아 백일장 장원 수상소감

광주경신여자고등학교 2학년 3반 김다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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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토피아 백일장 대회에서 장원의 영광을 안게 된 경신여자고등학교 2학년 김다영입니다. 우선 생각지도 못했던 큰 상에 아직도 얼떨떨하기도 하고 과분한 상에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여러 심사위원에 걸쳐 제 작품이 장원에 오르게 된 것에 뿌듯함도 느끼고 제 작품을 좋게 봐주셨다는 것에 너무 감사드립니다. 많은 참가자가 참여했을 이 백일장에 저는 장원은 다소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만약 못 탔더라도 이 좋은 백일장에 참여한 것만으로도 참 좋겠다 생각했는데 이렇게 큰 상까지 주시니 정말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우선 저는 여러 백일장을 알아보던 중 이 백일장 공지를 보고 접속하였다가 자유로운 주제를 한다는 소리를 듣고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광범위한 주제라고도 생각할 수 있지만 저는 차라리 자유로운 주제가 제 생각을 더 많이 전달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시를 쓰기 시작했고 그렇게 기간 안에 작품 3편을 완성해 제출할 수 있었습니다. 제가 노력한 결과인지 그 빛을 알아봐주시고 저에게 이러한 상의 영광이 주어졌습니다. 우선 제가 쓴 ‘귀농’이란 시는 제가 한 장의 사진을 보다 재개발로 인해 황폐해진 한 동네가 너무 초라하고 안쓰럽게 보였고 만약 누군가 고향을 떠나 있다가 왔을 때 고향이 이렇다면 어떨까? 하는 의문이 드는 마음에서 쓰게 되었습니다. 그런 저의 의문과 표현이 잘 반영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할머니 보따리에 별이 뜨면’은 한 다큐멘터리의 내용을 기억하며 쓴 것인데 할머니의 슬픈 눈동자가 너무 기억에 남았던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얼음’이라는 시는 아버지의 힘든 삶을 지켜보는 입장에서 써보았는데 우선 저의 아버지를 생각해서 써서 인지 더 감정이입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이런 계기로 시를 써서 정말 좋은 상을 받게 되어 너무 행복하고 다음에도 또 이런 시를 쓸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망설임 없이 다시 한 번 도전 해보고 싶습니다. 이 백일장은 제가 성장하는 데 있어 하나의 좋은 기회이고 행운인 것 같습니다. 다시 한 번 감사의 말씀 전달하고 싶습니다.

 

장원 작품

김다영(광주 경신여고)

얼음

 

 

그는 차가워진다

아버지의 혀 차는 소리도

어머니의 깊은 한숨도

형제들의 돌아선 어깨도

다신 그를 녹일 수 없다

남은 체온이 술병에 일렁이고

신문지 조각들마저 바람을 따라간다

외로움이 만성이 된 술병들은

바람에도 굳건히 놓은 채 움직이지 않는다

바닥에 아스팔트가 물결 모양으로 굽이치고

청소차들은 먼지 묻은 그를 닦아낸다

역 안에 남아있던 사람들의 냄새들은

보존되지 못한 채 쓸려나간다

모서리에 자리 잡은 그의 보금자리

움직일 수 있는 폭은 넓지 않다

새벽녘의 따사로운 햇빛이

지하도를 비춘다

삶의 악취 속에서

모두 다 자기 생계를 짊어지는 동안

그는 서서히 딱딱하게 굳어간다

 

 

 

 

운문부 차상

나은비(경기 서해고)

창조하라

 

 

인간은

도끼를 만들어 산을 가르고

살해당한 나무로 물길의 발목을 잡아두었지

 

인간은 창조하라

 

썩은 풀냄새를 만들고

땅을 죽이는 비를 만들고

눈에 보이는 바람을 만들고

 

인간은 창조하라

 

일광욕을 즐기는 북극곰을 만들고

쥐를 잡아 뜯어먹는 비둘기를 만들고

 

인간은 계속해서 창조하라

 

그리하여

다시 싱그러운 풀냄새를 만들어내고

어디든 쏘다니는 가벼운 바람을 만들어내고

 

천년의 산을 짓고

길을 잃은 강에게

스스로 길을 내는 방법을

모두 가르칠 때까지

 

멈출 줄 모르는 인간은

이제 멈추지 말고 창조하라.

 

 

 

 

산문부 차상

권복현(경북 성주여고)

꽃이 핀다는 것은

 

 

우연히 식물 하나를 키우기 시작했다. 손가락 한 마디 크기도 되지 않은 작은 새싹이 어떤 꽃을 피우지는 알 수 없었다. 손바닥만 한 화분에 흙을 담고 새싹을 심고 무럭무럭 자랄 수 있게 물도 주고 창가에 놓아 주었다. 제 손으로 직접 키운다는 사실만으로도 무척이나 뿌듯해진 나는 매일을 식물이 더 잘 자라도록 모든 정성을 쏟아 부었다. 새싹은 내 정성을 알아주기라도 한 듯이 손가락 한 마디만 했던 새싹이 줄기를 키워내 새끼손가락만큼이나 훌쩍 자랐다. 학교를 가는 날 이외에는 방안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던 나는 화분에 자라는 새싹과 함께 밖으로 나와 햇살을 온 몸으로 받아내고, 시원한 물을 마시며 몸을 스치는 바람을 맞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새싹은 점점 자라 작은 꽃망울을 피워냈다. 작은 꽃망울은 곧 아름다움을 내뿜는 꽃을 피워 냈다. 꽃은 봄이 왔다는 듯 인사를 해주었다. 살랑 이는 바람결에 온 잎을 내 던져 나를 만나게 되어 기쁘다는 듯 손을 흔들었다.

 

꽃이 핀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자란 꽃을 보면서 문뜩 나는 생각에 빠졌다. 단순히 생각해서 그냥 봄이 오는 신호일까. 마냥 춥기만 했던 몇 달의 겨울 동안, 부드러운 흙의 보살핌으로 쌀쌀한 바람을 견디어 내고, 눈이 가득 쌓인 그 위로 간간히 비추어지는 따사로운 햇살을 받아, 모든 차가운 눈빛들이 녹아 어느새 푸르스름한 새싹들이 기웃거리며 몸을 일으킬 때, 그 아름답고 따스한 봄날과 함께 드디어 기다린 그 날이 왔다는 듯. 반기며 온몸으로 인사하는 그 꽃. 그것을 이렇게 단지 봄을 알리는 그 신호. 사랑을 받고 아름다움을 간직한 그 모습으로 피어있는 꽃. 그 꽃이 핀다는 것은 과연 어떤 의미일까. 그리고 그 꽃이 내게 피어보인다면, 무슨 의미일까. 내 어두웠던 겨울을 지나 봄이 온다는 것을 알려주는 신호일까. 내게도 그런 의미일까. 혼자만의 외로움 속에 갇혔던 내게 물어봤다.

 

나는 어쩌면 그동안 지친 몸을 잔뜩 웅크려 어둠 속이 좋아 겨울 속을 해매이고 살았는지 모른다. 가끔씩 창문을 열면 보이는 새하얀 절경이 눈이 부실 정도로 내게 빛을 내뿜지만, 다시 창문의 커튼을 확 성질이 난다는 듯 쳐보이고는 다시 어둠 속에서 무언가 중얼거린 것이 삶의 일부분이었다. 그러던 내가 한 송이의 꽃을 피워냈다. 꽃에 대해 누구보다도 많은 사랑과 정성을 베풀었고, 흙 속에 파묻혀 작기만 해보였던 새싹이 마침내 꽃망울을 피워내고 아름다움을 내뿜는 꽃을 만들어냈다. 그래. 나는 내가 피워낸 꽃처럼 끝에는 아주 눈부시게 피어날 수 있다.

 

나는 꽃을 향해 중얼거렸다. 주문을 걸 듯 나는 외롭지 않아. 이깟 어둠 속을 한없이 걷고 또 걷는 다고해도 나는 외롭지 않아. 결코. 소리치고 또 소리쳐 외쳤다. 나는 외롭지 않아. 주먹을 있는 힘껏 세게 쥐어 손목이 덜덜하고 떨려온다. 좌절하고 싶지 않다. 무엇이 나를 이렇게 가로 막고 있다 해도 나는 결코 그 속에서 절망하고 싶지 않다. 나는 단지 추운 겨울 속을 이겨내기 위해 어둡고 거칠 거리지만, 그 속에 따스함을 잔뜩 가진 흙 속에서 나를 찾는 따사로운 햇살을 기다리고 있노라고. 마침내 꽃을 피워 낼 수 있다고. 수없이 생각했다. 나는 아주 작은 씨앗이고, 그래서 모든 것을 견디기에 힘들 뿐이라고. 꽃을 피우기 위해서는 아직 이르다고. 언젠가는 이 꽃처럼 세상의 따스한 바람결에 내 온 몸을 흔들리며 반길 수 있을 것이다. 햇살이 좋아 밖으로 나가 새하얀 꽃잎처럼 눈부신 미소를 지으며 초록빛 물결의 숲을 뛰어다닐 수 있을 것이다.

 

새롭게 피어난 희망적인 미래의 상상이 꽃이 핀다는 것이 어떤 의미일까, 라는 나의 물음에 대해 대답해 주었다. 꽃이 핀다는 건 말이다. 아마도 어둡기만 했던 누군가에게 눈부신 희망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싶다. 내게 피어난 꽃처럼, 나 역시 언젠가 눈부시게 아름답게 피어날 날이 다가오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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