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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호/집중조명/우대식/허공의 집을 새기는 철필― 숨은 신을 찾아서



박지웅을 만난 것도 이럭저럭 십여 년을 훨씬 넘겼으니 꽤 알겠다 싶기도 한데 곰곰이 돌이키니 무엇 하나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이 없다. 함께 축구를 하고 더러 밥을 먹고 술을 마시고 이러저런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언제나 변함없는 태도, 그것이 박지웅에 대한 인상이다. 느리고 크지 않은 그러나 부드러운 성량은 진중한 그의 성격과 매우 잘 맞아 떨어졌다. 개인사를 거의 묻지 않는 못된 습성을 지닌 탓에 박지웅의 시와 삶에 관한 이야기도 속으로만 어림짐작하고 지내왔다. 그의 시는 꽉 찬 속살을 지녔지만 비만하지 않았고 여항에 서 있었지만 누추하지 않았다. 나는 더러 그의 시가 그토록 유려하면서도 왜 슬픔의 혈흔이 묻어 있는가 물어보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나쁜 습성이다. 어쩌면 박지웅의 태도 역시도 나와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생활인으로서 그의 늠름함과 해학의 뿌리는 어디에서 연유하는가도 역시 물어보지 못했다. 이 불문不問의 철칙은 사실 박지웅이 가진 삶과 문학의 태도에서 비롯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혼돈과 번잡 속에서 외로움의 자처가 삶의 무늬로 번져나왔을 때 무엇을 묻는다는 것은 촌스러운 일이다. 박지웅은 보이지 않는 것을 허공에 철필로 새겨 넣는 작업을 해왔다. 석수장이가 돌을 만지듯 허공을 만지고 허공의 뼈를 가늠하고 거기에 다시 자신의 집을 새겨 넣는 지난한 작업을 수행해온 박지웅에게 단순히 낭만이라는 수사는 얻기에는 뭔가 부족하다. 그의 시에는 언제나 피가 묻어 있기는 하지만 죽임의 반대급부인 살림이라는 명제가 오롯이 자리 잡고 있다. 그가 더러 죽음을 옹호하는 것은 삶의 욕구로서의 아이러니이다.


저 집의 생계비는 대부분 슬픔이 댔을 것이다
비명 같은 것이 눌러앉은 듯 기괴한 폐가
집은 집에서 멀찍이 멀어져 집의 외지가 되었다
저걸 한 채라고 부를 수 있나
다 해진 신 한 짝처럼 국도변에 떨어져 있으니
겨우내 지나는 눈발마다 흰 발목을 넣어 볼 것이다
헐벗은 신을 더 외진 데로 끌고 가려 할 것이다
푹 내려앉은 지붕에 푹삭 꺼져 있는 한해살이풀들
풀의 가정에서 떨어져 나온 부수部首들
부스러져 속뜻을 헤아릴 수 없으니 무성한 뒷말뿐
한때 쓸쓸함도 다 남의 일이 되리라
겨울 잡목 숲에는 온통 해독할 수 없는 쐐기문자들
수만 근 점토판 비스듬히 들고 산등성이에 앉아
12월은 누구의 무엇에 대해 새기고 있는가
집이란 집일 수밖에 없는 핏줄들이 한 데 모여
일가一家를 이룬 아주 오랜 동안의 일
지푸라기 하나에서 나뭇잎과 발자국과 낮달과 눈동자
당신 귓속에 이른 물결소리 하나까지
제 영혼을 꾸려 본래 자리로 돌아가고 있다
빈집이 아니다, 신神이 하나 깨어진 것이다
지상에서 가장 가까웠던 신의 육신이 희미해지고 있다
          ―「신神이 하나 깨졌다」 전문


국도변의 폐가 풍경에서 비롯되었을 이 시는 집이라는 구체적인 공간의 의미를 잘 보여준다. 생계비의 대부분을 슬픔이 댔을 것이라는 추측은 소멸에 대한 안타까움과 궤를 같이 한다. 폐가를 “집의 외지”라고 했을 때 소멸의 정점에 선 한 점을 연상케 한다. 길가에 버려진 신발처럼 한겨울 내리는 눈을 오롯이 다 받아내야 하는 집의 운명이란 “한 채”라고 부를 수 없을 정도로 집이라는 개념에서 멀어져 버렸다. 한겨울 눈을 맞고 나면 더 외진 곳, 즉 집의 형태에서 더 멀어질 것이다. 시든 채 엉켜 있는 한해살이풀들은 이 집의 현주소이다. 시인이 생각하는 집이란 “집일 수밖에 없는 핏줄들이 한 데 모여 일가一家를” 이루는 것이다. 그 일가란 물리적 피붙이이기도 하지만 “지푸라기 하나에서 나뭇잎과 발자국과 낮달과 눈동자/당신 귓속에 이른 물결소리 하나까지”를 포함한 교감의 실체들이다. 집을 매개로 한 피붙이와 교감이 더 외진 곳으로 간다는 것은 시인에게는 세계의 상실을 뜻한다. 더 나가면 유토피아의 상실이다. 그래서 말한다. 집이 집의 외지가 되어 빈집 된다는 것은 “신神이 하나 깨어진 것”이라고. 시인에게 신과 가장 가까운 실체의 구현이 집이라는 사실은 그의 시가 어디에 발을 대고 있는가를 짐작케 해준다. 적어도 박지웅의 시의 근원이 현실에 바싹 조여들어간 곳에서 출발한다는 것을 뜻한다. 관념에서 관념으로 시적 사고가 진행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 발을 딛고 관념으로 이동하는 탓에 그의 시는 복안의 눈빛을 띠고 있다. 어쩌면 그의 시가 쉽게만 읽히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집의 소멸을 “신의 육신이 희미해지고 있다”고 발언했을 때 그의 시는 슬픔으로 우리를 인도하지만 더 없이 따뜻함을 느끼게 하는 것도 그의 현실감각에 공감하기 때문이다. 의식의 고아들이 늘 추위에 떨면서도 바라보는 별처럼 우리에게도 신이 있었다고 스스로 위로하게 된다.
숨은 신이 시인에게 집으로 구현된다는 것은 동시에 신의 부재가 무너진 집을 통해 인식된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흉가였다, 까마귀 떼 내려앉는/옛집 지붕에는 저녁보다 밤이 먼저 찾아왔다/뒤뜰에 쌓인 수백 가마의 어둠을 갉던 쥐새끼들”(「흑백의 새」 부분)이라는 진술은 죽음에 그 의식을 잇대고 있음을 보여준다. 앞의 시에서 보여준 신의 부재가 역력하게 드러나는 지점이다. “흑백의 능선 너머에 검은 머리를 풀었다 묶는 옛집”(「흑백의 새」 부분)은 “까마귀가 까마귀를 줄줄이 물고 내려”(「흑백의 새」 부분)오는 명백한 흉가의 형상을 하고 있다.  황폐화된 집의 형상을 통해 신의 부재를 그리는 이면에는 어쩌면 집을 복원하겠다는 열망이 내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흉가의 형상이 어떤 경험에서 연유하는지 혹은 어떤 심리의 내재적 실체인지 알 수는 없지만 저 안타까운 시선 너머에 신을 찾고자 하는 치열함을 느끼게 된다. “흰 바위 뒤 흰 소나무 너머 흰 거북 하나/흰 사슴이 흰 물에 주둥이 대던 검은 자개밥상”(「흑백의 새」 부분)에 둘러앉은 피붙이들 그리고 신의 강림, 이것이 흉가 혹은 외진 집의 유토피아로의 복원인 것이다.    
박지웅이 관념과 현실의 경계를 육탄으로 넘나들며(가뿐하지 않다. 그래서 믿음이 간다) 아주 먼 거리의 언어들을 서로 들이대며 견줄 때 독자로서 나는 박지웅의 윤리적 자아를 만나 깜짝 놀라기도 한다. 그것은 그가 늘 자신을 들여다보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자신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괴로운 일은 없다. 박지웅의 손에 들린 거울은 여항의 저잣거리이다.


놋그릇에 뼈다귀 하나 건져내
나는 구석구석 빠는 놈, 나는 허둥지둥
빠는 놈, 나는 침을 묻히는 놈
 
밥뚜껑에 쌓이는 뼈들
한때 소의 한 축이었으나 그림자도 없다
세상에 무덤덤한 일이 어디 있나
이 놋그릇이 소에게는 생지옥이다
(중략)
벽에 붙은 도가니탕 얼마 꼬리곰탕 얼마 수육 얼마
망자의 가격이 매겨진 비문을 훑으며
입을 벌린다, 아아 나는 나의 뱃속을 돌고 돌았구나  
밥자리에 다소곳이 따라붙은 놋쇠그림자


오래전 나는
내가 살아 있는 것에 반대하였다 
           ―「놋쇠황소」 부분


저잣거리에서 해장국을 먹으며 펼쳐지는 명상의 처음과 끝의 모든 주체는 “나”이다. 뼈다귀를 빨아먹는 야만성을 극대화는 이 세계를 살아가는 한 인간의 환유로 작동한다. 팔라리스왕의 놋쇠 항아리 감옥을 인유한 이 시는 자아의 안과 밖 더 나아가 우리의 관념에 내재한 죽음과 삶을 포함한 세계의 경계가 얼마나 쓸모없는 것인가 극명히 보여준다. 시를 읽고 나면 빨아먹는 주체와 빨아 먹히는 객체는 서로 다른 존재들인가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세부적인 삶의 원리 같은 것에는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는다. 가령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그토록 깔금을 떨며 벌레나 쥐 한 마리에 경악을 하면서도 소의 내장(생각해보라. 소의 소화기관에서 분비된 액체들의 엉김)을 잘도 먹는다. 시적 주체는 놋그릇에 담긴 뼈를 빨아먹고 있다. 그러다 밥그릇에 가득 쌓인 뼈를 보고 “이 놋그릇이 소에게는 생지옥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럭저럭 살아가는 삶의 원리에 대한 배반이다. “세상에 무덤덤한 일이 어디 있나”하는 물음은 바로 그럭저럭에 대한 반발이다. 주체와 객체를 뒤바꾸었을 때 천국과 지옥은 바뀐다. 놋쇠 황소라는 감옥에 집어 놓고 불을 때면 춤추지 않을 생명이 어디 있겠는가? 물론 이 때의 춤이란 절규와 아비규환의 몸부림일 터이다. 놋쇠 국그릇에서 바라본 황소의 지옥이 인간의 삶의 원리로 작동한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인간이 생각하는 지옥이라는 관념을 막 바로 만나게 된다. 벽에 붙은 음식 가격을 비문으로 읽어낼 때 자신의 뱃속이 팔라리스 왕의 놋쇠 황소지옥이라고 인지하게 된다. 자신의 뱃속에서 춤추는 황소들 그리고 비명, 그러다 자신마저도 그 놋쇠 황소 지옥으로 들어가고야 말 자명한 운명에 대한 직시는 “오래 전에 나는/내가 살아 있는 것에 반대하였다”는 비장한 선언을 하기에 이른다. 이 진술은 이 시 전체의 핵심이다. 그렇다면 시적화자가 지향하는 것은 죽음인가 하는 문제는 단순하지만은 않다. 이 비장한 선언은 여항의 저잣거리에서 생활의 고구考究를 통해 그가 도달한 삶의 상相이기는 하지만 언어의 표면적 의미를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려운 측면이 있다. 황소감옥이라고 하는 현실의 환유를 철퇴로 부수어 버리고 싶은 욕망이 도사리고 있다. 그는 그동안 안개나 나비 혹은 박새 같은 작고 사소한 것의 미묘한 떨림이나 흐름 같은 것에 주목해왔다. 그것은 거대 담론 너머의 생의 기운에 대한 감지이다. 가령 ‘나비는 꽃이 읽는 글씨“(「나비를 읽는 법」 부분)라고 툭 내뱉었을 때 독자는 생명의 경이를 느끼게 되는 순간이 있다. 박지웅에게 생명이라는 실체가 종교나 철학과 같은 거대 담론을 통해 구현되는 것이 아니라 슬며시 놓여 진 것 혹은 사이에 끼워진 것의 뿌리 깊은 생명력을 통해 인지된다는 사실은 두 가지의 동양적 관념을 바탕에 두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는 측은지심惻隱之心이며 다른 하나는 무쇠뿔처럼 혼자 가겠다는 불굴의 의지가 그것이다. 이 음양의 조화는 박지웅의 시를 더 탄력적이고 역동적인 호흡으로 이끈다. 호흡은 살림이고 생의 리듬이다.      


뒤꼍 꽃 깊은 자리에서 당신이 꺼내온 꽃신 한 짝
가픈 품에서 내미는데 죽은 박새였다
심장을 훔쳐 먹은 듯 더운 숨 받은 꽃신은 따사하였다
망설이다 꽃신 벗어놓고 새의 영혼은 어디로 날아가는가
얼핏 당신 눈시울에 빛 고운 날갯짓이 비쳤으나     
물결도 바람결도 나는 영 모르는 일로 하였다
산모퉁이 저물녘에 어렴풋 여린 마음이 아득하였을까
꽃신 한 짝 댓돌에 잠시 두었다가 거두어 
달이 자주 앉는 살구나무 눈썹쯤에 올려놓았다
그 곁에 머지않아 발이 꼭 맞는 허공이 지날 것 같았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산하山河가 있었다 
                   ―「별방리」 전문        


시 제목 별방리는 아마 지명일 터다. 당신이라는 대타가 꽃밭에서 주워서 내게 준 꽃신 한 짝이 죽은 박새라는 데서 시는 출발한다. 꽃신이 따뜻했다는 것은 박새가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것을 뜻한다. 박새의 육신이 꽃신이라는 아름다운 은유 속에 죽은 생명에 대한 안타까움이 묻어 있다. “산모퉁이 저물녘에 어렴풋 여린 마음이 아득하였을까”라는 구절은 죽은 것을 추모하는 내면적 의식을 보여준다. 앞에 말한 사소하고 여린 것에 대한 무한한 애정이 바로 이런 것이다. 그리고 죽은 생명을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달이 자주 앉는 살구나무 눈썹쯤에 올려놓”는다. 죽음의 아름다운 완성은 “발이 꼭 맞는 허공”으로 인해 가능하다. 허공으로부터 비가 오고 바람이 불고 이 지상으로부터 박새의 육신이 완전히 소멸될 때 박새는 발이 꼭 맞는 죽음을 맞게 될 것이다. 이 지극한 마음이 박지웅에게는 시인의 마음이다. 어느 인터뷰에서 박지웅은 “시와 사람(人)이 상충하지 않고 조화를 이룬 상태일 때에만 시인이라고” 믿는다고 고백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자기 욕망에 대한 유불리를 떠나 언제나 詩와 보폭을 맞추는 사람, 그 상태를 지속적으로 유지할 때” 시인이라는 칭호를 얻을 수 있다는 자기 고백은 진실로 무서운 측면이 있다. 시와 보폭을 맞춘다는 것은 사무사思無邪의 지경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동일한 개념으로 읽힌다. 이 지극한 마음을 지닌 자만이 시인이라는 칭호를 얻을 수 있다는 저 개결한 자기고백은 스스로를 닦고 연마하는 기제로 작동하며 투철한 윤리적 자아로 거듭나게 된다. 시와 시인의 관계 속에서 파생된 윤리적 자아가 견인주의적 면모를 띄는 이유는 자기고백의 완성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자기고백의 완성을 향한 욕망은 자신이 든 거울을 통해 보이지 않는 내면 혹은 공간으로서는 허공을 비추고자 한다. 그의 시를 보면 그 거울을 통해 분명 무언가 보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붉은 비 혈석전각」 같은 시는 박지웅이 보이지 않는 실체와 얼마나 지난한 싸움을 하지는 보여준다. 겹겹이 쌓아놓은 이미지들로 인해 한눈에 의미망을 파악하는 것은 쉽지 않다. 어쩌면 시를 보는 내 졸안拙眼 탓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 혈석血石에 바람을 앉히거나 고래를 들일 때에는 촌철寸鐵로 틀림이 없이 공들여야 한다 돌을 잘 비워야 돌 면에 바람이 붙는데 나뭇잎이 적당히 비벼진 바람소리가 날 때 철필鐵筆을 거두어야 바람결이 깃든다”(「붉은 비 혈석전각」부분)는 구절을 볼 때 잔인하도록 투철한 장인정신을 엿보게 된다. 돌 면에 바람을 붙이고 바람결을 깃들게 하는 것이 그의 주된 과업이다. 그는 철필鐵筆을 들고 촌철寸鐵의 시간을 가늠하고 있다. 모든 촉각과 감각의 섬모를 긴장시킨 채 마음의 시간을 응시하고 있다. 다른 곳을 바라보아서는 안된다. 오르페우스의 운명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허공에 철필을 새기는 자로서 박지웅의 시는 무섭도록 단단하고 유연하다. 허공을 볼 수 있다는 것은 시인에게 축복이지만 인간으로서는 저주에 가깝다. 박지웅의 시가 어디로 갈지 나는 알 수 없다. 나는 허공을 보지 못한 자이기 때문이다.
작품론 말미에 여담이 허용된다면 당구치기에 관해 객설을 잠시 풀어 놓는다. 당구수로 그는 300 나는 150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절반의 실력뿐이 안 되는 내가 번번이 이겨왔다. 세 알 혹은 네 알이 굴러가는 당구알은 가히 철학적 담론을 가능케 하겠다 싶다. 언제 쿠바의 해안가 당구장에서 한 판 치자. 더러 일몰의 해안을 바라보며 시가를 물고 천천히 키스를 피하면서 샷. 내가 이길 것이다. 박지웅보다 내가 좀 더 현실적인 플레이를 한다. 이 여담은 독자가 보듯 시 이야기가 아니다.          



우대식 1999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늙은 의자에 앉아 바다를 보다』, 『단검』, 『설산 국경』. 산문집 『죽은 시인들의 사회』.『죽에 죽고 시에 살다』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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