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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권(69호-72호)
2019.02.18 17:39

69호/집중조명/박지웅/신작시/놋쇠황소 외 2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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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호/집중조명/박지웅/신작시/놋쇠황소 외 2편




놋그릇에 뼈다귀 하나 건져내
나는 구석구석 빠는 놈, 나는 허둥지둥
빠는 놈, 나는 침을 묻히는 놈
 
밥뚜껑에 쌓이는 뼈들
한때 소의 한 축이었으나 그림자도 없다
세상에 무덤덤한 일이 어디 있나
이 놋그릇이 소에게는 생지옥이다


옛 팔라리스왕은 나를 놋쇠황소에 집어넣고
배 밑에 장작을 때어 내 몸에 있는 춤을 모두 꺼내었다
훗날 왕도 형틀에 들어가 춤을 추었다


국물을 들이키며, 뼈도 못 추린 이야기
국물도 없는 가난한 생을 떠올리다 문득
저세상의 바닥까지 깨끗이 비우는 게 산목숨이라니

그럴 줄 알았다 여기가 지옥이다


벽에 붙은 도가니탕 얼마 꼬리곰탕 얼마 수육 얼마
망자의 가격이 매겨진 비문을 훑으며
입을 벌린다, 아아 나는 나의 뱃속을 돌고 돌았구나  

밥자리에 다소곳이 따라붙은 놋쇠그림자


오래전 나는
내가 살아 있는 것에 반대하였다





별방리



뒤꼍 꽃 깊은 자리에서 당신이 꺼내온 꽃신 한 짝
가픈 품에서 내미는데 죽은 박새였다
심장을 훔쳐 먹은 듯 더운 숨 받은 꽃신은 따사하였다
망설이다 꽃신 벗어놓고 새의 영혼은 어디로 날아가는가
얼핏 당신 눈시울에 빛 고운 날갯짓이 비쳤으나     
물결도 바람결도 나는 영 모르는 일로 하였다
산모퉁이 저물녘에 어렴풋 여린 마음이 아득하였을까
꽃신 한 짝 댓돌에 잠시 두었다가 거두어 
달이 자주 앉는 살구나무 눈썹쯤에 올려놓았다
그 곁에 머지않아 발이 꼭 맞는 허공이 지날 것 같았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산하山河가 있었다 





붉은 비 혈석전각



작살 맞은 공중은 보이지 않지만 작대기를 부여잡고 지상에 떨어진다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날 것 같지만 공중도 피를 흘린다 등인지 옆구리인지 쏟아지는 공중의 선혈은 흰 듯하지만 과녁에 문득 선홍빛 꽃이 서는 것은 봄밤에 주로 있는 일, 핏방울에 명주실 꿰어 돌멩이에 묶어 놓고 사나흘 기다리면 돌 속에 무늬가 들어온다 혈석血石에 바람을 앉히거나 고래를 들일 때에는 촌철寸鐵로 틀림이 없이 공들여야 한다 돌을 잘 비워야 돌 면에 바람이 붙는데 나뭇잎이 적당히 비벼진 바람소리가 날 때 철필鐵筆을 거두어야 바람결이 깃든다 좋은 돌은 물불을 가리지 않고 받겠으나 새김칼을 든 손이 새의 깃 같아야 이를 수 있는 일, 고래 또한 마음이 있는 짐승으로 뭍의 기억을 가졌으니 돌의 숨통을 잘 터주어야 돌에 몸을 대어본다 숨이 깊은 돌은 다 하늘이 내리는 것이겠으나 돌을 눕히면 드러나는 수평선을 찾는 것은 쇠붓을 든 마음의 일이다 그 수심水深을 보고서야 고래는 들어온다





자선대표시

신神이 하나 깨졌다



저 집의 생계비는 대부분 슬픔이 댔을 것이다
비명 같은 것이 눌러앉은 듯 기괴한 폐가
집은 집에서 멀찍이 멀어져 집의 외지가 되었다
저걸 한 채라고 부를 수 있나
다 해진 신 한 짝처럼 국도변에 떨어져 있으니
겨우내 지나는 눈발마다 흰 발목을 넣어 볼 것이다
헐벗은 신을 더 외진 데로 끌고 가려 할 것이다
푹 내려앉은 지붕에 폭삭 꺼져 있는 한해살이풀들 
풀의 가정에서 떨어져 나온 부수部首들
부스러져 속뜻을 헤아릴 수 없으니 무성한 뒷말뿐
한때 쓸쓸함도 다 남의 일이 되리라
겨울 잡목 숲에는 온통 해독할 수 없는 쐐기문자들
수만 근 점토판 비스듬히 들고 산등성이에 앉아
12월은 누구의 무엇에 대해 새기고 있는가
집이란 집일 수밖에 없는 핏줄들이 한 데 모여
일가一家를 이룬 아주 오랜 동안의 일 
지푸라기 하나에서 나뭇잎과 발자국과 낮달과 눈동자 
당신 귓속에 이른 물결소리 하나까지 
제 영혼을 꾸려 본래 자리로 돌아가고 있다
빈집이 아니다, 신神이 하나 깨어진 것이다
지상에 가장 가까웠던 신의 육신이 희미해지고 있다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2018년 1-2월호) 발표





흑백의 새



흉가였다, 까마귀 떼 내려앉는
옛집 지붕에는 저녁보다 밤이 먼저 찾아왔다
뒤뜰에 쌓인 수백 가마의 어둠을 갉던 쥐새끼들  
밑바닥이 뜯긴 마음에 한두 줌 풀이 났다 
구멍 난 집구석을 부지깽이로 푹푹 쑤시면
까마귀들이 깨어나 검은색을 조금씩 옆으로 옮겼다
흰 바위 뒤 흰 소나무 너머 흰 거북 하나
흰 사슴이 흰 물에 주둥이 대던 검은 자개밥상 두고
부엌에 까마귀처럼 앉아 있던 여자
흉한 터였다, 옛집은 검고 장독간 민들레에 앉은
흑백의 봄은 쥐죽은 듯 고요했다 흑백의 새끼들 치느라
입과 눈에 흙 바르고 엎드려 산 여자처럼
감나무가 있었지만 꽃도 열매도 글썽이다 말았다
가끔 낙동강 둑에 나가 밤새 갈대를 보았다
흰 것들이 무리지어 강 너머 이른 일을 새벽이라 부를까  
색깔이 입혀지지 않는 갈대 한 다발  
집에 들인 뒤 흑백의 식물에서 자주 안개가 피어났다
그 뒤 오랫동안 슬픔의 노른자위였던 태양
흑백의 능선 너머에 검은 머리를 풀었다 묶는 옛집      
공중에서 끊겨 풀린 밧줄처럼
까마귀가 까마귀들을 줄줄이 물고 내려왔다

―『지리산문학』(천년의시작, 2017) 발표





시론

시詩, 영혼의 모국어 



‘나’라는 존재와 관계를 맺고 있는 수많은 타자를 생각한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는 ‘지금’이라는 시공의 현재성과 ‘한글프로그램’과 전기와 의자를 비롯한 수많은 물질과 직간접적안 관계를 맺고 있다. 나와 타자와의 관계가 가능할 수 있는 촘촘하고 거대한 인드라망의 그물을 잠시만 떠올려 봐도 ‘그들’이 없이 ‘나’는 단 일 초도 존재할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내가 발을 딛고 있는 지구와 이 행성을 유지할 수 있게 하는 우주의 질서를 생각하면 우리 존재의 무게란 가늠하기 쉽지 않다. ‘나’는 곧 ‘너’에게 의지하여 존재하고, ‘너’는 ‘나’에 의해 존재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은 종교적 관점이 아니라 명백한 과학적 사실이다. 이것이 모든 실상의 요체요, 본질이라고 생각한다. 얼마 전 세상을 떠난 이승훈 선생님의 시詩를 읽으며 깊은 울림을 받았다.

아무 나무나 보고 말한다. ‘선생 고맙소’ 겨울아침, 겨울아침보고도 ‘선생 고맙소’ 말한다. 빈 휴게소 지나간다. 오늘은 모두가 고맙다. 전깃줄에 앉은 참새 두 마리, 작은 이발소보고도 인사해야지. 눈이 내리네. ‘선생 고맙소’ 그래 고맙다 고마워, 산길을 간다.
―「선생 고맙소」(『시를 사랑하는 사람들』 1-2, 2018)

시에 등장하는 ‘선생先生’들은 ‘나무’, ‘겨울아침’, ‘참새’, ‘이발소’이다. 화자가 관계를 맺고 있는 타자들은 일반적 관점에서는 선생이라는 호칭으로 부르기 어려운 대상들이지만, 시의 화자는 자신과 교감하는 이 대상들에 대해 공손한 마음으로 예를 갖추고 있다. 부고를 들은 날, 연세대 서문西門 골목길을 걸어 연세장례식장에 다녀왔다. 선생께서 마지막으로 내놓은 따뜻한 국밥 한 그릇을 받고 온 사흘 뒤, 문예지에 실린 시인의 유작. 한평생 희로애락을 나누었을 세상을 향해 고맙다, 고맙다 인사를 하고 자신만의 ‘산길’을 걸어 멀어져 간 시인의 뒷모습이 마음에 그려졌다. 그리고 눈이 내렸다. 나무도 이발소도 그 뒷모습도 하얗게 덮는 눈발들. 행여나 시인이 이 세상에 남긴 빚이 있다면, 시 「선생 고맙소」로 천 냥 빚을 갚고도 남음이 있지 않을까. 

작년 11월, 직장에 사직서를 내고 전업 시인으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출판사 사정이 어려워진 것이 한두 해의 일이 아니었다. ‘말 한 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는 말이 무겁게 다가오는 요즘이다. 이 문장을 뒤집어 보면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낸다’고도 여겨지기 때문이다. 말의 육체를 시詩라는 문학으로 섬기고 살아가는 일에 전념하려니 글자 하나하나가 쉽게 앞으로 나아가질 않는다. 시詩가 존재와 존재 사이에 놓인 장막을 걷고 그 자리에 샛길을 여는 일이라면 나의 말 한마디, 글자 하나에 삿됨이 없어야 할 터인데 하는 걱정이 앞서는 것이다. 무심코 내뱉은 나의 말 한마디가 상대의 마음에 닿아 빛이 되거나 화를 불러일으키는 일을 이루다 헤아릴 수 없다. 처음 일기장에 시를 쓰던 1984년 중학생 시절 이후로 나는 나의 천직이 시라는 것에 단 한 번도 토를 달지 않았다. 시를 쓸 때는 행복했고, 시를 쓰는 것만으로도 나는 충만했다. 순수의 시절이었다. 생명과 글을 섬기고 그 씨를 뿌리고 살아가는 일에 일심을 다하려는 이 순간에 문득 두려움이 앞선다. ‘시詩바라기’만 하던 내 마음을 돌아보게 된다. 시업은 곧 농업일 터인데, 내가 뿌린 한마디 말과 글이 금이 되고 화를 불러들이는 이치를 생각하면 시 한 줄을 내는 마음에 두려움이 스미는 것이다. 마음이 그러하니 시를 천직으로 삼는 일이 가당키나 한 일인지 묻고 또 되물을 밖에.

공자는 시경에 담은 삼백여 편의 시를 한 마디로 말하길, “생각에 삿됨이 없다(사무사思無邪)”고 했다. 이 말에 빗대어 쉰 나이에 바라보는 나의 시詩밭은 여전히 돌밭이오, 제대로 농사를 짓지 못한 오래된 묵정밭이다. 저 마음밭에 쌓인 돌들을 어떻게 치워야 할 것인가. 저 돌무더기의 정체는 ‘욕망’일 것이다. 돌아보니, 시를 사랑하여 시작한 동거가 전쟁으로 이어진 듯하다. 한 번 이겨 보려고 늘 시에 싸움을 걸었던 것이다. 그토록 사랑하는 시를 어느 순간 이겨야 할 대상으로 인식하고 어처구니없는 사단을 벌인 것은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이었다. 적절한 비유인지는 모르겠으나, 날뛰어봤자 부처님 손바닥 안의 손오공은 아니었는지. 시의 손바닥에서 가당찮은 재주를 피운 것은 아닌지. 이게 다 내가 시를 제대로 사랑하지 못한 어리석음에서 빚어진 일이다. 혼자 아옹다옹하다가 지쳐 쓰러진 날들이 어디 하루 이틀인가. 손오공이 부처님의 손바닥을 벗어나지 못한 것은 그 마음이 불심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시심을 아니라면 나는 시를 영원히 이해하지 못한 채 우주미아로 떠돌 것이다. 내가 시를 처음 짓던 1984년 그날의 마음에 시심이 깃들었을까. 세 살 어린 아이의 마음, 동심童心에는 삿됨이 없지 않을까. 초심과 하심을 되새기면서 내 삶의 후반기, 과연 시를 천직으로 삼을 자격이 있는지부터 깊이 따져 볼 일이다. 

얼마 전 우연히 시각장애 학우들과 시에 대해 이야기할 기회가 주어졌다. 시가 무엇인지 아이들이 느낄 수 있도록 해 줄 수 있을까. 고심이 깊었다.
“마음의 눈은 세상의 모든 사람이 태어날 때 이미 가지고 태어납니다. 그러나 늙어죽을 때까지 이 눈을 뜨지 못하고, 이런 눈이 제 마음속에 있다는 사실조차도 인식하지 못하고 살다가 결국은 헛되이 시간을 버리고 이 땅에서 사라집니다. 우리는 그런 이들을 ‘눈뜬봉사’라고 부릅니다. 우리의 삶을 살피는 가장 밝은 눈은 우리 마음속에 있음을 나는 확신합니다. 마음의 눈으로 본 세계를 조금씩 써봅시다. 마음으로 느낀 것을 써봅시다. 마음에 웅크리고 있는 나 자신이 있다면 그 마음에 들어가서 손을 내밀어 봅시다. 그렇게 해서 나온 글을 나는 시詩라고 생각합니다. 시는 나와 나 사이에 있는 거리, 나와 당신들 사이에 놓인 벽에 구멍을 내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아이들은 선생님들의 도움을 받으며 살아오면서 자기들이 촉각, 청각, 미각, 후각 등으로 경험한 일들을 글로 표현하기 시작했다. 시라는 낯선 장르에 막막해하며 연필만 만지작거리는 아이들에게 말을 좀 더 보태었다. 
“시는 세상 어디에도 있습니다. 우리가 들고 다니는 가방에도 있고 우리가 마시는 한 모금의 물에도 있습니다. 발길에 부딪치는 돌멩이에도 있고, 우리 입에 들어오는 음식에도, 그 음식을 입으로 옮기고 음미하는 순간에도 있습니다. 시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곁에 있습니다. 세상 어디에도 있지만, 그것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정해진 창작 시간이 지나고 아이들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쓴 자신의 시를 소리 내어 읽었다. (수업에 참가한 아이들은 전맹은 아니었다.) 수업을 받은 한 아이는 순식간에 세 편을 써내고 앞으로 더 많은 시를 지어 보고 싶다고도 했다. 그 마음이 고맙고 고마웠다. 모든 예술이 그러하듯, 문학 또한 자연에 대한 모방에서 출발하여 자연으로 돌아가려는 자연회귀의 일종이다. 인간은 왜 예술로써 자연을 모방하는가? 두말할 것도 없이 자연은 가장 아름다운 존재이고, 인간이 곧 자연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대자연이라는 모성에 대한 회귀행위의 한 갈래인 시를 쓴다는 것은 모국어로 어머니의 이름을 부르는 행위이고, 이를 통해 인간은 자기 존재의 본 터전으로 되돌아갈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자연이라는 인류의 공통어를 마음에 담아 흉내 내고 구사할 수 있다면 현대를 살아가는 ‘나’와 ‘너’는 그 즉시 온전한 하나로 연결/회복될 수 있지 않을까. 인류가 세대를 거듭하면서 잃어버린 또 부단히 되찾으려 애쓴 것은 다름 아닌 인간 본연의 모습, 순수한 자연의 본성이고, 시라는 인류 영혼의 모국어는 우리를 반드시 그곳으로 인도할 것이라고 믿는다.

오래전 누군가가 내게 말했다. “언젠가는 너 자신을 만날 것이다. 그러면 반드시 울 것이다.” 나 자신은 어디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으며, 그날의 울음은 또 얼마나 진할 것인가. 어머니로부터 분리되었을 때, 나는 최초의 울음을 울었다. 다시 먼 훗날 ‘어머니’를 만날 때 처음처럼 울음을 터트릴 것이다. 그날이 오면, 어쩌면 나는 내가 사랑한 모든 말을 잊을 것이다. 오로지 울 것이다. 



박지웅 2004년 《시와사상》으로 등단, 2005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너의 반은 꽃이다』, 『구름과 집 사이를 걸었다』, 『빈 손가락에 나비가 앉았다』. 제11회 지리산문학상, 제19회 천상병문학상. 제21회 시와시학 젊은시인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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