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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권(65호-68호)
2017.10.27 17:47

66호/연재산문/이경림/50일-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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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산문



이경림 (시인)




50일




퇴근길에 a가 이틀 남은 날짜가 프린트 된 비행기 티켓 예약증을 여행사에서 받아왔다며 내민다.
-50일이 금방 지나갔네. 엄만 올 때마다 여행 한 번 제대로 못하고 혼자 전철 타고 버스 타고 노숙자처럼 돌아다니다 끝나네. 난 왜 이럴까? 엄마 가고 나면 또 한참 후회하고 슬퍼하고 그러다 또 잊어버리겠지? 빌어먹을!
 그가 시니컬하게 내 뱉는다.
-괜찮아. 오히려 네가 붙어 다니지 않아 부담 없어서 더 좋았어. 몰래 연애도 하고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추억을 남겼잖아.  
-연애?
그가 시니컬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것도 추억이야?
그래, 그럼 모든 건 기억 속에 남아 살아가기 마련이지. 꼭 유명한 곳 , 좋은 곳을 본다고 오래 남는 건 아니야. 이곳의 냄새 이곳의 공기 이곳에서 느꼈던 고독, 호기심…….
난 매번 너를 만나러 오는 길이 설레고 의미 있어.
-모르겠다. 엄마가 가져가고 싶은 거 있으면 사러 가자 .
우리는 가까운 마트에 가서 한국에서 흔히 살 수 없는 소스 종류와 가공된 수프 몇 개를 샀다.
-엄만  취미가 참 독특해, 다른 사람들은 옷이나 백 같은 거 아님 신발이라도 사는데 엄만 그런 건 관심도 없나 봐?
그가 약간 빈정거리는 투로 투덜거렸다.      
-그래, 난 먹보다. 됐니?
우리는 깔깔거리며 먹음직스레 썰어져 있는 커다란 연어 몇 토막과 켄 맥주 한 상자를 샀다.
그 밤 우리는 연어 회와 몇 가지 안주를 놓고 캔 맥주를 마시며 밤늦도록 두런두런 짐을 쌌다. 문득 피곤이 몰려 왔다. 
-엄마, 지금 졸리구나. 눈이 반 쯤 감겼네. 들어가 자요. 내가 싸 놓을 테니.
-아냐, 너도 자 내일 내가 싸도 돼.
나는 비틀거리며 침실로 가 누웠다. 그러나 막상 자려니 쉬 잠이 들지 않았다.
지난 50일이 안개처럼 캄캄한 거실 속을 어른거렸다. 열 두 시간의 비행으로 만난 지구 반대편의 수많은 사람들, 이질적인 상황들, 익숙지 않은 냄새, 익숙지 않은 공기, 그 속을 스쳐가던 헤아릴 수 없는 눈빛들, 소리들……. 그 설명할 수 없는 시간 속에서 무슨 혼령처럼 어른거리던 나, (라는 시간의 덩어리). 어쩌면, 그때 나를 스쳐간 수많은 나들이 어둠 속을 어른거린다.
‘내일은 도서관에 들려 빌린 책을 반환하고 돌아오는 길에 마리엔에게 작별인사라도 해야겠다.’ 생각하며 나는 어둑한 천장에 희미하게 보이는 사방연속 무늬 속으로난 멀고 먼 길로 걸어갔다. 

아무 일도 일어난 건 없었다. 그러나 a는 50일이 되었다고, 떠나야 한다고, 분주한 얼굴을 하고 집안을 왔다갔다 하며 나의 검은 가방에다 무언가 자꾸 꾸려넣고 아이들은 뭔가 잃어버린 사람처럼 어리둥절한 표정을 하다가 엉거주춤 학교로 간다.
나는 마리엔에게 전화를 걸어 그의 엔틱숍 건너편에 있는 스시 집에서 저녁이나 같이 하자고 약속을 했다. 점심 때 쯤 마트에 들려 먹거리 몇 가지를 더 사가지고 와 a의 냉장고를 채워놓고 나머지는 나의 가방에 넣었다. 그리고 아마도 이번 여행의 마지막이 될 집안 청소를 했다. 청소기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돌아간다. 젯빛 카펫 위로 비행기 활주로 같은 길이 난다. 내일 이 시간이면 텅 비어 있을 이 공간이 생각난다. 순간 둔탁한 초인종 소리가 들린다. 문을 열고 보니 바로 아래층에 사는 중국여인이다.
-아기가 지금 자고 있는데 조금 있다가 청소를 하면 안 될까요?
그는 몹시 미안한 표정을 하고 묻는다.
-미안해요. 그렇게 하죠.
그는 땡큐를 연발하며 내려갔다. 대부분 이층이나 삼층으로 지어진 이곳 칸도들은 대부분 목재로 지어져 있어 소리에 취약한 편이다. 어떤 땐 걸을 때 출렁거리는 느낌까지 들 때도 있다. 청소 대신 아이들이 아무렇게나 벗어놓은 옷들을 챙겨들고 아래층 미니 수영장 앞에 있는 세탁실로 갔다. 세탁기 웅웅거리는 소리와 철썩거리는 물소리가 문 밖까지 흘러나온다.
청소가 끝나고 나니 두 시가 조금 넘어 있었다. 오후 네 시면 어둑해지는 거리를 생각하며 나는 서둘러 집을 나갔다. 그리고 새삼 동화 속처럼 아름다워 보이는 집들과 정원들 사이를 걸었다. 그 때의 그곳은 내가 매일 산책하던 그곳이 아니었다. 그 때 그곳에서 보는 집들 사람들 아름드리나무 사이로 비치는 햇빛, 무심히 지나는 사람들…… 그 모든 것은 처음이었다. 선인장의 정원, 새빨간 부겐베리아 꽃이 터널을 이룬 하얀 집, 당나귀만 한 개를 데리고 산보하는 젊은 부부, 막다른 길 끝 그 너머로 흐르는 로스엔젤레스 강, the first church라는 현판이 달린 흰 교회당 마당에서 빵을 받기 위해 줄서 있는 홈리스들, 모퉁이 소공원 벤치에 물끄러미 앉아 있는 노인들…… 모든 것들은 그대로인 채 또 다른 시간이었다. 선인장의 정원에서 거대한 선인장을 심던 남자는 보이지 않는다. 나는 무어 파크 공원의 벤치에 앉아 젊은 부부가 아이 둘을 데리고 나와 그네를 밀고 있는 풍경 뒤에 앉는다. 자주 보던 사람들이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간단히 눈인사를 하고 지나간다. 한 쪽 구석 벤치에 세탁실에서 이따금 만나던 노인이 여전히 빨간 티셔츠에 청바지를 입고 앉아 있다. 할리우드에서 영화 편집 일을 했다고 하던 생각이 난다. 그는 무슨 신문인지 신문을 읽고 있다. 노년의 무료함은 어디나 비슷하다. 
터헝가 에비뉴에 꼬마 점멸등이 켜지는 시간이었다. 나는 서둘러 마리엔과 약속한 제페니스 스시 집으로 향한다.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마리엔은 건강해 보인다. 연블루빛 원피스가 그를 품위 있게 받치고 있다 창가 쪽 테이불에서 주문한 스시를 먹으며 내가 물었다.
-며칠 전에는 무슨 일이 있었나요?
그는 차분한 목소리로,
-no problume.
하고 그는 단호히 말했다. 그리고,
-I,m so sorry about that day.
하며 겸연쩍은 표정을 지었다. 나는 더 묻지 않았다. 그리고 우리는 그동안 있었던 사소한 일들에 관해 그리고 우리들의 나이가 주는 쓸쓸함에 관해 이야기를 했다.
-동양인들은 신기해요. 어떻게 밥을 이렇게 얇게 빚은 생선에 싸서 먹을 생각을 했을까?
그는 스시 하나를 집어 들여다보며 말했다.
-사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섬나라가 일본이잖아요?
나도 레돈도 비치에서 처망치와 게를 망치로 깨 먹는 것을 보고 놀랐어요 식탁에 커다란 망치라니!
내가 웃자 그가, 
-생각해 보니 그렇군요.
하며 웃었다.
저녁을 먹고 가까운 카페에서 차 한 잔을 마시고 우리는 로스엔젤레스 강변을 따라 끝없이 뻗어있는 길을 걸었다. 맞은 편 산등성이에 진자줏빛 해가 아직도 이글거리는 얼굴을 반 쯤 걸친 채 헐떡이고 있었다. 그 때 우리는 강변을 따라 길게 지어진 한 방송국 앞을 지나고 있었다.
- 아마 뉴스가 없는 날은 없는 것 같죠?
내가 웃으며 말하자,
-사는 일이 다 뉴스죠. 크고 작은 뉴스를 만들며 사람들은 살아가죠. 그래서 방송국이 생기고 신문사가 있고 기자가 있고 병원도 있고 소방서도 있고 음…… 당신 같은 시인도 있고, 나 같은 장사꾼도 있고…….
그는 웃지 않았다. 우울한 것 같기도, 쓸쓸한 것 같기도 한 그늘이 잠시 그를 스치고 지나갔다. 거리가 점점 어둠에 싸여갔다. 無限이 검은 보자기를 펄럭이며 도시를 뒤덮고 있었다. 해는 눈 깜빡할 사이에 사라지고 없었다. 잠시 전 까지 있던 그 진자주빛 이글거림의 자리에도 잿빛 無限이 와서 우두커니 있었다. 지붕 위에도 골목에도 달리는 자동차들 사이에도 어디든 그것이 있었다. 그녀의 회색 머리칼 사이에도 나의 발치에도, ‘f0r sale’이라는 팻말이 붙은 어느 집 정원의 잔디 위에도.
-당신은 내일이면 열 두 시간 동안 저 하늘 위에 있겠군요. 마치 神처럼.
-like a god?
내가 웃으며 되묻자 그도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당신과 친구가 되어 좋았어요. 샌디에고 해변도, 도서관도, 공원의 잔디도…….
-당신과 함께한 시간들이 새삼 신비로워요.
내가 말했다.
-마찬가지예요. 사람의 만남이란 참 신기하죠.
그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당신의 파란 눈은 밤에 봐도 파랗군요?
내가 농담을 하자 그도,
-당신의 검은 눈도 역시!
끝이 보지 않는 긴 거리의 어스름이 묵묵히 우리를 데리고 갔다.
터헝가 스트릿과 콜텍스 에비뉴가 만나는 모퉁이에서 우리는 헤어졌다. 나는 그의 긴 그림자가 모퉁 벽을 잡고 흔들리다가 바닥으로 내려와 문득 휘어지는 것을 오래 보고 있었다.
상점들이 보석처럼 반짝이기 시작했다. 쇠심줄 같은 길 위로 차들이 들소처럼 달려갔다. 하루치의 삶이 번득이며 무한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모든 것이 ‘삶’이라는 이상한 병을 앓는 중이었다. 모든 존재들이 각자 자신들의 깊고 서늘한 실루엣을 속에서 깊이 앓는 중이었다, 신음소리 같은 것들이 비명처럼 조용하게 그리고 빠르게 지나갔다. 사랑에 빠진 쥐들처럼. 울며 날리는 눈발처럼.
 
a는 다른 날보다 조금 일찍 들어왔다. 그가 샤워를 하고 드라이기로 머리를 말리고 옷을 갈아입기 위해 옷장을 여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밥을 안쳤다. 문득 ‘이 모든 것이 꿈이 아닐까?’ 하고 생각할 때 뽀얗고 맑은 얼굴로 그가 나왔다. 그리고,
-오늘 저녁에는 닭고기 바비큐나 해 먹을까?
하며 쇼핑백 속에서 바비큐용 닭을 꺼내 놓았다.
-그래 난 또 뭘 할까?     
내가 공연히 분주한 흉내를 내자
-그냥 거기 앉아있어요. 뭐 별 할 것도 없어요.     
하고 그가 말했다. 그는 사온 닭을 오븐 속에 넣고 오븐을 켜고 온도를 맞추고, 냉장고에서 몇 가지 반찬을 꺼냈다.
-뭐 맛있는 거 먹으러 나갈 걸 그랬나?
문득 그가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나가서 먹는 것이 나는 입에 안 맞더라. 바비큐 맛있을 것 같은데?
-그래두…….
그는 뭔가 아쉬운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이거 다 익을 때까지 뭐 할 일 있으면 해요.
그가 말할 때 문득 한 가지 생각이 스쳐갔다. 나는,
-나 잠깐 뭐 좀 하다 나와서 한 시간 후 쯤 밥 먹어도 되지?
하고 방으로 들어가 컴퓨터 앞에 앉았다. 다시는 오지 않을 이 기적 같은 순간에 대하여 문득 그에게 말하고 싶었다.

a에게

사랑하는 a, 네가 있어 내 생은 빛났다. 네 번 째 방문인 이곳에서의 50일을 나는 결코 잊지못할 것이다. 화려하고도 고독해 보이던 할리우드 주변의 거리들, 아름다운 정원의 잔디를 들어 올리며 구렁이처럼 기어 다니던 아름드리나무의 뿌리들, 거대한 선인장들, 그 사이를 거침없이 달려가던 귀여운 나의 손자 티모티와 데니얼, 그리고 그들의 훌륭한 엄마가 된 너, 한없이 자랑스러우면서 참을 수 없이 가련한 너희들은 나의 분신이며 나였다. 어리석게도 한생 나는 나의 북받치는 죄책감과 미안함을 표현하는 방법을 터득하지 못한 채 매일 낯선 골목들을 헤매고 다녔다. 종려나무와 유칼리나무와 온갖 열대식물들과 몸통이 유난히 흰 자작나무들이 계절 없이 서 있는 이상한 시간 속을 헤매는 너 처럼.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과거도 미래도 아니고 현재라고 되뇌는 것으로 어리석은 나를 위로하면서.
도착한지 며칠 되지 않은 어느 날 캄캄한 네 방문을 열었을 때 작은 셀폰 화면을 마주하고 잠든 너를 발견했을 때, 마치 심장이 멎는 듯 한 아픔을 느꼈던 기억이 난다. 너는 늘 습관이 된 일인지도 모르지만 그 일은 이 낯선 땅 낯선 문화 속에서 어디에도 기댈 곳 없던 네가 홀로 견뎌온 20년을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습관처럼 생면부지의 땅에서 홀로 견디고 있는 또 다른 나인 너를 생각한다. 부디 자신을 소중히 생각하기 바란다. 너는 너라는 개체가 아니야. 너라는 한 인간이 탄생되기 위하여 너의 핏속을 걸어 나간 수많은 존재들의 대표인 거야. 그 사람을 헤아려 보면 한 대륙도 모자랄 거다. 그러니까 너를 함부로 한다는 것은 그 수많은 복수의 인간들을 함부로 한다는 것이 되는 것이지. 부디 자신을 아끼고 소중히 하기 바란다. 너무 초조해 하지 마라. 당분간 고생스럽겠지만 모든 일은 결국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다.
‘세계는 한 권의 책’이라고 한 작가는 말했다. 너는 지금 너라는 책의 그 수많은 페이지 중 한 페이지를 살고 있을 뿐이야. 내용이 어떻게 전개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저 우리는 각자 자신이라는 책의 주인공으로 살 수 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난 것이라고 이따금 나는 스스로를 변명처럼 위로해 본단다. 부디 건강 잘 챙기고 어떤 일을 만나든 성급하게 생각하지 말기 바란다.
2014년 2월 18일 엄마가  
 
           
나는 편지를 프린터로 뽑아 봉투에 넣고 다시 여권이 들어 있는 작은 백에 넣었다.
-엄마 식사해요.
a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저녁상 위에는 목이 잘린 채 배가 갈라진 닭 한 마리가 노릇노릇 구어진 채 누워 있었다
-맛있겠네. 잘 구워졌다.
내가 말했다.
-야, 바비큐다.
아이들 둘이 환한 얼굴로 식탁으로 달려왔다.
     
 다시, 비행
출발 날 아침 a는 밤 12시 비행기니까 집에서 7시 쯤 나가면 되겠다며 6시 반 쯤 도착할 테니 준비하고 있으라는 말을 남기고 출근을 했다,
아이들은 쑥스럽게 다가와 허그를 하고 하나씩 학교로 갔다. 텅 빈 집을 둘러보다가 나는 엊저녁에 쓴 편지를 a의 화장대 서랍에 넣고 현관을 나와 위층 계단을 따라 옥상으로 올라갔다. 옥상에는 그리 크지 않은 풀장이 있었고 주변에 비치파라솔과 벤치가 있었다.
맞은편에 중년의 여인이 풀에 발을 담그고 책을 읽고 있었다. 50일 동안 이 건물에서 잠들고 숨 쉬면서 나는 왜 옥상에 무엇이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여인의 맞은편에 앉아 나도 발을 적셨다. 아침나절 햇살이 기분 좋게 따듯했다. 팜츄리 나무의 꼭대기가 손에 닿을 듯 가까웠다.
새삼 ‘이별’이란 말이 떠올랐다. 까닭 모르게 설레는 가슴으로 걷던 거리들이 보인다. 횡단보도 앞에서 방향을 가늠하느라 물끄러미 서 있곤 하던 내가 떠오른다. 정방형으로 지어진 칸도들은 사방으로 창문이 나 있었다. 그 안에서 어른거리던 한 번도 본적 없는 사람들, 이름은 모르지만 이제는 낯익은 나무들…… 길을 잃고 헤매던 골목들, ‘have a nice walking!’ 하고 인사를 건네던 족히 90은 넘었을 노 부부, 그리고 이제는 친구가 된 마리엔, 익숙하게 드나들던 ‘트레이드 조’라는 친자연식 마트…… 모든 것들이 사라지려는 준비를 하고 있는 것 같다. 아니 그들 사이를 그림자처럼 어른거리던 내가 사라지려 하고 있다는 표현이 적당할 것 같다. 
‘모든 것은 사라지는 중이다’ 중얼거리며 나는 눈이 부시도록 새파란 하늘을 본다.
-do you like a cup of coffee?
맞은 편 여인이 휴대용 커피 병을 들어 올리며 묻는다.
-it's okay.
내가 손을 저으며 말하자,
-did you move in?
하고 묻는다. 나는,
-여행자예요. 오늘 떠나요.
하고 대답하자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책을 보기 시작했다.
문득 이 또한 지나가는 풍경 중의 하나가 되리라 생각하니 뭔가 싸 한 것이 가슴을 훑으며 지나간다.

LA 공항은 드나드는 여행자들의 숫자와 그 위치에 비해 너무 낡았다는 생각이 든다, 여행지로서 LA를 찾는 사람들도 많지만 그곳은 중간 기착지로 여러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다른 나라로 가기 위해 환승하는 사람들로 항상 북적거린다. a와 나는 이래저래 줄였으나 두 트렁크나 되는 짐을 부치기 위해 라인업 한 사람들 뒤에 섰다. 한국인들은 어느 나라나 많다. 마치 영종 비행장에 서있는 것처럼 전혀 낯설지 않은 풍경 속에서 a가 말했다
-한국 사람들이 언제부터 이렇게 세계의 공항을 다 차지하게 되었지?
-잘 사는 게 뭐 나빠?
-아니, 그게 아니고 뭐랄까 너무 떠들고 휘젓고 다닌다 할까?
-한풀이 같은 건지도 모르지.
나는 한 쪽 눈을 찡끗하며 앞에 옆에 선 사람들을 눈으로 가리켰다

짐을 부치고 공항 까페에서 차 한 잔을 마시며 내가 말했다.
-차 마시고 나 들어갈 테니까 일찍 집에 가서 쉬어.
-그래야겠다. 오늘 여러 가지로 죽여주는 날이었거든.
그의 얼굴에 피곤이 역력했다. 입국장 문 앞에서 멀뚱히 바라보는 그에게 내가 말했다.
- 이리와 봐, 우리 딸, 한 번 안아보자.
그가 멋쩍은 듯 주춤거리고 다가와 내 어깨에 팔을 걸치고 나는 그를 꼭 안았다.
눈물이 핑 돌았다. 어렸을 적 이후 그 아이를 안아본 적이 있었던가? 펄떡이는 그의 심장이 내게 전달되었다.
-이 노친네가 오늘 따라 왜 이러실까? 그만 하자 누가 보면 게이들인 줄 알겠다.
투덜거리며 팔을 푸는 그의 눈가가 촉촉이 젖어 있다.

열두 시간의 비행. 마리엔의 말처럼 이 시간 나는 비몽사몽 신의 세계를 헤매고 있는 것일까. 지난 50일도 아니 다가올 시간도 모두 이런 것이 아닐까? 커튼을 조금 올리니 비행기는 눈부신 구름바다 위에 떠 있다. 사람들은 앉은 채 잠들어 있고 몇몇이 깨어 내용도 모르는 영화에 빠져 있다. 승무원이 음료수 카를 밀고 묻는다.
‘커피? 오렌지? 와인?’
오렌지 한 잔을 마시는데 안내 방송이 나온다.
-이 비행기는 지금 날짜 변경선을 지나고 있습니다 기류관계로 비행기가 흔들릴 수 있으니 안전벨트를 잠그고 착석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다시 잠에 들었고 중간에 비빔밥을 먹은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모두 한 줄로 앉아 거무스름한 어둠 속을 앉은 채 달려가고 있었다.
 睡眠에도 지친 나의 속으로 한 소리가 들어온다, ‘인천이다!’
눈을 뜨고 보니 화면에 일본해를 지나 인천이 닿을 듯 가까이 떠 있는 비행기가 보인다.
그리고 다시 안내 방송이 나온다
-이 비행기는 15분 후 이곳 시간 새벽 4시 정각에 인천공항에 착륙하겠습니다. 승객여러분은 안전벨트를 매고 착석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어제 자정에 출발하던 일이 까마득 떠오른다. 그리고 분명 12시간을 하늘에 뜬 채 날아왔는데 같은 날 새벽 4시라니? 분명 그 시간에 나는 a의 집 옥상 풀장에 발을 담그고 이별에 대해 생각했다. 그때의 나와 이 컴컴하고 비좁은 비행기 속에서 흔들리고 있는 나, 분명 같은 시간에 공존하고 있는데, 과연 어느 것이 진짜 나일까? 그 둘이 다 나라면 내가 상상도 못할 수많은 상황 속에 동시에 존재하는 나들이 있다는 게 아닐까?
그렇다면 사라진 그 8 시간 속에서 내가 떠 있던 그 구름 위, 날짜 변경선을 지날 때 흔들리던 몸, 그 속을 왔다갔다 하던 사람들…… 그것들은 다 무엇이란 말인가?  문득 날짜나 시간이란 이 무한 속에서 인간이 길을 잃지 않도록 인간이 정해 놓은 작은 규칙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더욱 확실해진다.

나는 생각한다. ‘나라고 불리는 존재가 줄기차게 이어가고 있는 이 삶은 과연 실재일까?’
아아, 이 이상한 시간 속을 어른거리는 실재라고도 환영이라고도 할 수 없는 <나>가 존재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 끝가지 읽어준 독자들에게 깊이 감사드립니다.







▶이경림_ 1989년 《문학과비평》으로 등단. 시집 『토씨찾기』, 『그 곳에도 사거리는 있다』, 『시절 하나 온다, 잡아먹자』, 『상자들』, 『내 몸 속에 푸른 호랑이가 있다』 시 산문집 『나만 아는 정원이 있다』, 산문집 『언제부턴가 우는 것을 잊어버렸다』. 비평집 『사유의 깊이 관찰의 깊이.』 한국문학 번역원 선정 영어권 번역시집 『A New Season Approaching, Devour it』. 지리산문학상 수상. 2016: 제 1회 윤동주 서시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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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19 제17권(65호-68호) 66호/신작시/유순덕/폴포인트 외 1편 편집부 2017.10.26 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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