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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권(69호-72호)
2019.02.18 17:33

69호/소시집/황희순/너무 높은 세상 외 4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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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호/소시집/황희순/너무 높은 세상 외 4편



그가 사다리를 접어 메고 간다
또 다른 그가 사다리를 접어 메고 따라간다
서성이던 그가 사다리를 한 번 더 접어 메고 간다
또 다른 그가 사다리를 접어 메고 그의 뒤를 따라간다
……
또 다른 그가 사다리를 접어 메고 그의 뒤를 따라간다
………………


사다릴 밟고 올라서면, 어디
잡을 수 있는 별이 있을까
뒷모습이 닮은 저들은 사람인가
전생에 보았던 그림인가


깊이 몸 접어야
마음 놓이는, 나는
사람인가,
누구의 사다리인가






거두와 절미 사이



빛나는 것이 밤하늘의 별만은 아니지, 누군가 버리고 간, (목구멍에 걸린 말을 뱉으려다 뚝 잘라 버린 머리같이), 길가에 처박힌 구멍 난 헬멧, 안에 고인 뱉어내지 못한, 차가운 빗물에 젖고서야 반짝, 외치는 한마디 빛, 얼마나 긴 시간 이 밤을 기다린 걸까


그때 그날, 목에 걸렸던 그 말은, 약간의 취기와 비애가 몰려오던 그 밤 길 끝에 버린 내 머리는, 빛이라도 한 번 뿜었으려나, 새로 돋은 이 머리는 꼬리인지도 몰라, 둘둘 말아 쥐고 견디던 꼬리가 굳어 머리 흉내를 내는 건지도 몰라, 하여 시도 때도 없이 목구멍을 새나가는 말들을 어쩌지 못하는 거야, 반짝, 한마디면 족할 구차한 세상을 주절주절 흘리며, 겨우 꼬리가, 이렇게 오래 꿋꿋이 버티는 건 반칙이지, 꼬리 자르기 딱 좋은 세밑가지에





7월의 거울



개미 떼에 끌려가는 무당벌레
포기한 걸까, 왜 반항하지 않나
누구 편을 들어줄까
개미굴로 끌려 들어갈 즈음 무당벌레가
지그재그로 줄행랑친다
장난삼아 앞을 막았더니 딱 멈춘다
광속으로 몰려온 개미 떼가 다시 끌고 간다
왜 참견했느냐 따지지 마라, 재수 없는 네가
재수 없는 인간을 만난 것일 뿐
살아있는 한, 길 막는 발 깨물고라도
잽싸게 도망쳐야지, 누굴 원망해
언제, 어디, 어떤 상황에서나
숨 끊어질 때까지 빡빡 기어가야지
먹거나 먹히거나, 이도 저도 아니거나
그들의 게임이 어떻게 끝났는지, 나는
모르는 일이다





9월의 거울



영양은 사자가 무서워 도망치는 걸까
죽는 게 무섭다는 걸 감각으로 알까
어미의 어미가 그러했듯
사자가 나타나면 무조건 도망쳐야 해
있는 힘 다해 도망치다 돌아보니
사자가 안 보이면 영양은, 에잇
턱에 차는 숨을 삼키며 웃을까
도망친 이유를 금방 잊을까
죽고 사는 일에도 연습이 필요해
지금 연습 중이야, 우물거리다
사자가 다시 툭 나타나면
전과 다른 감각으로 도망칠까
다시는 없겠거니 살다가 닥치는 벽
밀쳐낸 벽이 벌떡 일어나고 또 일어나는
믿을 수 없는 세상을, 영양과 나와 너와
기러기와 벌과 곱등이와 동고동락
동병상련 동상각몽, 끝없는 이 미로를
어떻게 탈출하나





Last Holiday



시간은 흐르고 시간을 따라 계절이 바뀌고
지친 거북이처럼 천천히 가기도 하지
가끔은 먹이를 노리는 매처럼 모든 것을 무시하고
삶을 뚫고 지나가기도 해
시간이 약이라는 말은 틀린 말, 상처를
아물게 하고 기억을 지울 뿐
더 나아지는 것은 없고 달라지는 것만 있지
우린 항상 무슨 일이 생기길 기다리며
가치 없는 일에 너무 매달리고 있어
두려운가 봐, 그러니
‘태어나지 않는 게 최선이야, 세상은
생각할 수 있는 최악의 것만 모여 사는
고뇌하는 영혼과 악마로 가득한 지옥’*
아들아, 어미가 범죄를 저질렀구나
이런 망할 놈의 세상에 생명을 탄생시키다니
고뇌를 겪게 하다니
인생은 이유 없는 시작의 연속
반복되는 춤을 두려워하지만 않으면 돼
라라라, 멈추지만 않으면 돼


* 쇼펜하우어.
* 위 시는 영화 <Last Holiday>와 <안토니아스 라인> 대사 참조.





시작메모

모르겠다



할아버지는 뒤란 처마 밑 새끼줄에 총총 매달아놓은 곶감을 몰래몰래 빼먹었다. 아이도 풀방구리에 쥐 드나들 듯했다. 할아버지와 딱 마주치는 날이면 목을 어깨에 깊이 숨기고 히히대며 같이 빼먹었다. 누가 곶감 훔쳐 먹는다고 구시렁대는 할머니를 모른 체했다. 어느 날 동네사람들이 할아버지를 땅에 묻었다. 그날 이후 달걀귀신 보자기귀신 곶감귀신, 동네 귀신이라는 귀신은 우리 집 뒤란으로 다 모여들었다. 심술 난 아이는 할머니에게 할아버지가 곶감 다 빼먹었다고 일러바쳤다. 똥꼬 보인다고 놀리는 할아버지가 없어 장독대 뒤에 숨어 쉬도 하지 않았다. 반백년이 깜빡 지나가고 아이의 웃음 끝에도 할아버지 닮은 주름이 조롱조롱 매달리기 시작했다. ‘황정서’라 이름하던 할아버지를 지금은 아무도 이야기하지 않는다. 다 잊었다.

한 100년 후 누가 당신을 나를 이야기할 것인가. 먼지 쌓인 어떤 책꽂이에선가 삭고 있을 당신과 나의 시집을 생각해 본다. 아니, 책이 한 권이라도 지구상에 남아있기나 할까. 언젠가 종이는 사라지고 로봇이 詩를 지어 읊고 인간은 눈만 껌뻑이며 듣는 사이보그가 되어있을지 모른다. 다리와 몸통은 종잇장처럼 가벼워지고 머리만 큰 콩나물마냥 어딘가에 심겨져 버튼만으로 세상을 이리 왈 저리 왈, 그러면서 놀고 있을지 모른다. 서서히 변해 가는 이 허무맹랑한 세상을, 글은 왜 쓰고 왜 사는지 모르겠다. 모르겠다 모르겠다 하다 보면 나도 어느 결엔가 사라지고 할아버지처럼 잊히겠지. 태초부터 여태 돌고 도는 자연의 생태계, 이 길고 질긴 인연의 고리가 詩다. 굳이 글자로 적지 않아도 세상천지가 위대한 詩다. 그런 거 같다. 아, 잘 모르겠다.



황희순 1999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미끼』 외 3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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