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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호/제8회 김구용시문학상/백인덕/‘생장/소멸’의 부정적 긴장緊張 놀이―허은실의 시세계



1.
머리가 아프다. 눈은 맑아지고 가슴은 시리도록 가라앉는데 자꾸 ‘머리’가 아프다. 여타 상황을 배제하고 지금 이 순간의 감상을 적는다면, 허은실 시인의 시집을 거듭 읽고 난 뒤 상태가 그렇다. 감상感想이 끝나는 지점에서 ‘감상(鑑賞, Aesthetic dialogue)’이 시작된다. 아니 “목을 지나온 검처럼/꽃잎이 가르는 허공/그 틈으로”(「윤삼월」) 부지불식간에 진즉에 수행되고 있었을 것이다.
주지의 사실이지만 영속적으로 자가 증식하는 유기체는 없다. 어떤 변곡점에 이르러 제 원소로 환원해 또 다른 ‘사건과 의미의 지평’(그것조차도 확인할 수는 없지만)으로 환幻한다고 이야기 되어질 뿐이다. 치졸한 삼단논법으로 그 유기체가 바로 ‘나’라는 것이 논리적으로 증명된다. 또한 그 ‘나’는 ‘기억과 망각’이라는 몇 차원의 기제system로 얽혀있는 ‘우리’, 결국 한 개인이면서 동시에 모두인 보편적 존재로서의 ‘나’가 된다. 생은 어느 순간부터 ‘생장’에서 ‘소멸’로 기우는가. ‘생장/소멸’이라 했지만, ‘바bar’는 일반적으로 ’대립, 대치‘의 표지지만 여기서는 ’미끄러짐sliding’의 기표로 사용했다. 결국 생장한다는 것은 끊임없이 소멸이 미끄러져 들어오는 사태의 다름이 아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곡점에 이를 때까지 어느 한쪽의 힘이 허물어져 하나로 포개지지 않는 ‘긴장’의 연속일 뿐이다. ‘삶’을 이런 식으로 정의하다보면 아무 재미도 감동도 느끼지 못하기 일쑤다. 어쩌면 이 간단한 ‘사실’을 즉 ‘실재’를 사유의 이면裏面을 건드려 환기喚起하는 방법이 바로 ‘시적인 것’의 묘미妙味일지도 모른다.


입안 가득 손톱이 차올라
뱉어내도 비워지지 않네
문을 긁다 빠진 손톱들
더러는 얼굴에 붙어 떨어지지 않네


숲은 수런수런 소문을 기르네
바람은 뼈마디를 건너
몸속에 신전을 짓고
바람에선 쇠맛이 나


어찌 오셨는지요 아흐레 아침
손금이 아파요
누가 여기다 슬픔을 슬어놓고 갔나요
내 혀가 말을 꾸미고 있어요


괜찮다 아가, 다시는
태어나지 말거라


서 있는 것들은 그림자를 기르네
사이를 껴안은 벽들이 우네
울음을 건너온 몸은
서늘하여 평안하네


바람이 부네
누가 내 이름을 부르네
몸을 벗었으니 옷을 지어야지
―「바람이 부네. 누가 이름을 부르네」 전문


모든 시어는 그 자체로 상징이다. 현대시는 이에 대한 뚜렷한 경향을 보인다. 완고하게 사물과 결속結束한 시어는 이해의 차원에서는 유용할지 몰라도 미지未知를 열지는 못한다. 인용 작품에서 ‘손톱’은 변하는 생의 표지로 읽힌다. 우리 몸에서 매일 죽어나가는 것은 흔히 각질이라 부르는 세포지만 ‘성장/소멸’의 이미지를 동시적으로 내포하면서 뚜렷하게 각인되는 부분은 ‘손톱과 머리카락’ 같은 것들이다.
시인은 “문을 긁다 빠진 손톱들”이 ‘입 안 가득’ 차오르고 ‘얼굴에 붙어’ 떨어지지 않는 일종의 불편함을 토로吐露하면서 작품을 연다. 단순하게 ‘입’이 ‘말(언어)’이고 ‘얼굴’이 일종의 ‘승인(재귀적 자기 확인)’이라고 보면 ‘손톱’은 망령 같은 ‘기억’이라 할 수 있다. 결국 첫 연은 자기에 갇힌 ‘나’를 드러낸다고 보이는데, 이어지는 연에서 ‘숲’이 ‘바람’ 탓에 ‘소문’을 기르고, ‘신전’을 짓는 것과 대비해 볼 수도 있다. 시인은 다시 “손금이 아파요”라고 고백한다. 자기 손금에 누군지는 모르지만 “슬픔을 슬어놓고” 갔다는 인식은 현대시의 기본 정조 중 하나인 ‘비극성’을 되살려낸다. 그러나 정작 견딜 수 없는 것은 “내 혀가 말을 꾸미고”있다는 것이다. 이 작품은 표제가 의미심장하다. ‘바람이 부네. 누가 이름을 부르네’는 언뜻 복합문으로 읽으면 애련哀憐한 정조에 빠져들기 좋게 나열되었지만, 가운데 사용된 것이 쉼표(,)가 아니라 마침표(.)라는 것을 눈여겨보면 이야기는 달라질 수 있다. 마침표란 한 사건이나 한 단위의 사유가 종결됐다는 상징적 표지다. 그러므로 ‘바람이 부네’와 ‘누가 이름을 부르네’는 전혀 다른 사건이 다른 이유에 의해 병렬 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최소한 이것은 세계와 내가 무관하다고 보였던 시절이 있었다는 것의 반증이다.
굳이 소포클레스를 원용하지 않더라도 인생의 비극 중에 가장 큰 비극은 태어났다는 것에 있다. 우리의 수고, 슬픔, 어쩌면 겪지 않아도 좋았을 그 모든 사건, 날로 커져가는 비극적 인식 이 모두는 태어나는 순간, 즉 ‘손금’이 주어졌을 때 이미 예정된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시인은 “괜찮다 아가, 다시는/태어나지 말거라” 하며 자기 시원始原으로부터 떠난다. 이 ‘떠남’은 일종의 자성自省을, 아니 세계로 열리는 ‘눈’을 던져준다. “서 있는 것들은 그림자를 기르네/사이를 껴안은 벽들이 우네/울음을 건너온 몸은/서늘하여 평안하네”라고 대비나 중첩이 아닌 어떤 발견을 노래하게 해준다. ‘서 있는 것, 벽’이 결국 내 ‘몸’과 다르지 않음을 받아들이게 되면서 문득 ‘마침표’는 사라지고 “바람이 부네/누가 내 이름을 부르네”라는 동일 사건으로의 승인이 시작된다.


돌멩이처럼 날아오는
내 이름을 내가 맞고서
엎드려 간다 가마
묻는다
묻지 못한다


쭈그리고 앉아
마른세수를 하는 사람아
지난 계절 조그맣게 울던
풀벌레들은 어디로 갔는가
거미줄에 빛나던 물방울들
물방울에 맺혔던 얼굴들은


바다는 다시 저물어
저녁에는
이름을 부른다
―「저녁의 호명」 부분


저녁은 누군가 돌아오는 시간이다. 아니 이것은 우리 문명이 길들인 관습적 사유일 뿐이다. 저녁은 누군가 떠나는 시간이다. 아니 아예 ‘저녁’이란 시간, 때, 찰나는 맺히지 않는다. 시인이 저녁에 ‘호명’하는 것은 “돌멩이처럼 날아오는 ‘내 이름’이다. 저무는 ‘너’를 부른다고 가정할 때,” 거미줄에 빛나던 물방울들/물방울에 맺혔던 얼굴들“이 더 애절哀切해진다. 그러나 어디로 가는가 무엇이 되는가”라는 질문이 ‘속’이 아니라 ‘밖(실존, 세계)’에서 생성되려면 돌멩이처럼 날아오는 이름은 결코 너여서는 안 된다. 그것은 오롯이 ‘나’이어야 한다.
두 편의 작품을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허은실 시인의 시적 경로는 매우 명징明澄하다. 필자는 자선시의 발표순서와 그 내력까지 다 알지 못하지만 이후의 작품들이 ‘긴장의 놀이’로써 얼마나 슬프고 경쾌하게 전개될지가 자못 궁금해진다. 이 또한 시인의 미덕이리라.

2.
허은실 시인의 작품은 시어가 배치를 통해 구조화되는 순간 시적 의미를 발생시키는 단순해 보이는 자연스러움과 읽고 난 뒤에 열리는 사유의 복잡함이 ‘긴장’을 늦추지 않으면서 긴밀하게 결합되게 한다는 데 있다. 아도르노식의 ‘부정적 변증법’이라 쓰고 싶었지만, 감당할만한 능력이 없어 ‘긴장의 놀이’라고 우회했다. 하지만 ‘부정의 부정’으로 ‘진정한 긍정’이라는 식의 닫힌 체계를 자기 인식도 없이, 즉 시가 마치 ‘진리’의 보루堡壘거나 인식적 수고의 대단한 결과물처럼 과대 포장하는 것과는 다른 그 무엇을 말하고 싶었다.


꽃은 시들고
불로 구운 그릇은 깨진다


타인을 견디는 것과
외로움을 견디는 일
어떤 것이 더 난해한가


다 자라지도 않았는데 늙어가고 있다
그러나 감상은 단지 기후 같은 것


완전히 절망하지도
온전히 희망하지도
미안하지만 나의 모자여
나는 아무것도 믿지 않는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허상
녹슬어 부서지는 동상銅像보다는
방구석 먼지와 머리카락의 연대를 믿겠다
어금니 뒤쪽을 착색하는 니코틴과
죽은 뒤에도 자라는 손톱의 습관을
희망하겠다

약속의 말보다는 복숭아의 욕창을
애무보다는 허벅지를 무는 벼룩을
상서로운 빛보다는
거울 속에서 나를 바라보는
희미한 어둠을


캄캄한 길에선
먼빛을 디뎌야 하므로


날 수 없어 춤을 추는 나날


흔들리는 찌를 지니고 사는 사람들은
별자리를 그린다
―「목 없는 나날」 전문


예의 그렇지만 작품의 표제는 도발적이고 매혹적이다. ‘목 없는 나날’은 본문 안에 있을 수도 있고 그것이 환기하는 분위기에 있을 수도 있고, 아예 없을 수도(아니, 독자가 스스로 생성해내야 할지도) 있다.
간단하고 강한 명제로 시작한다. “꽃은 시들고/불로 구운 그릇은 깨진다” 시간이안 물리적 속성 같은 것을 배제하고 비유 자체를 비유로 옮기면, “사람은 죽고/관계는 흩어진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비록 ‘난해’라는 어휘를 사용했지만 “타인을 견디는 것과/외로움을 견디는 일”은 ‘주체와 대상’, ‘거리와 밀도’ 같은 일종의 ‘앎’을 버리면 변별성 자체가 소멸될지도 모른다. 시인은 “다 자라지도 않았는데 늙어가고 있다/그러나 감상은 단지 기후 같은 것”이라고 했다. 어느 시점에서는(그것이 생의生意의 임계점에 가급적 도달하기 전에) 어쩔 수 없는 것에 대해 아예 무관심한 것이 더 낳을 때도 있다. 가령 ‘기후’ 같은 것. 바람은 바람을 불러일으키지 못하고 ‘기후’는 여전히 빛나는 과학기술로도 예측 불가능한 것으로 남아 있다.
시인은 그 지점을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다. “약속의 말보다는 복숭아의 욕창을/애무보다는 허벅지를 무는 벼룩을/상서로운 빛보다는/거울 속에서 나를 바라보는/희미한 어둠을” 시인은 ‘희망’하겠다라고 했다. 언표 된 희망은 이미 절반 쯤 이루어진 것과 같다. 시인이 「유전」에서 거의 입말로 보여준 “할머니와 딸과 딸의 딸들과 딸들의 딸, 열두 개의 젖 모여 온 방에 젖내 진동하는 밤.”이 마치 실제 했던 것처럼. 그러나 간과看過해서는 안 되는 것이 여기서 ‘복숭아의 욕창, 허벅지를 무는 벼룩, 나를 바라보는 어둠’이 그 무엇의 대체물이 아니라는 점이다. 학습된 우리의 사유는 ‘대체代替’를 지나치게 손쉽게 받아들이지만, 시는 비유에 기초하면서도 비유하는 것과 비유되는 것 사이의 건널 수 없는 강을 뚜렷하게 인지한다. 이것은 ‘희망’아라는 어휘가 함축한 의미 그 자체로 수행된 것이 아니지만, 시인이 “날 수 없어 춤을 추는 나날”이라고 분명히 표현한 데서도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날개가 부재한 존재로서 ‘나’에게 나는 것은 부재를 증명하는 것이지만 ‘춤’은 몸의 존재로서 실행 가능한 세계이다. 부재와 가능성, 어느 것이 더 우리 생과 밀착하는가. 그러므로 “날 수 없어 춤을 추는 나날”은 언어적 아이러니가 되는데, 이 반어적 정신이 낡은 표현에 생기生氣를 불어넣는 수법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시인의 시작詩作능력의 일단이 자연스럽게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사는 이 사회, 이 문명, 이 시대는 모든 ‘긴장tension’을 ’스트레스‘라는 사회병리학적 용어로 정의하면서 마치 사람들이 정신의 끈을 놓고 이리저리 부박浮薄하기를 강요하는 행태를 국가적 차원에서 수행한다. 허은실 시인은 이미 “타인의 손에 이마를 맡기고 있을 때/나는 조금 선량해지는 것 같아”(「이마」)라고 한 걸음 더 나아간 시를 보여 준다. 흔히 집중하게 되는 ‘눈썹, 미간’이 아니라 ‘이마’라는 것도 작품을 다시 보게 하지만, “이마의 크기가/손바닥의 크기와 비슷한 이유”까지 유추해 낸 데서 시인의 능력이 두드러진다.


별을 낳기 위해
중력을 거부해야 하므로
소화되지 않는 말이
밑구녕이 거꾸로
치밀어 올라오고 


벚나무 수억의 유방 부풀어
가렵다
접신한 듯
미열에 들뜬 나무들
제 몸을 게워놓는다
 
들썩이는 치열 
나는 나로부터 멀다 
헝클어지는 지문
불화로부터 별의 머리카락은 자란다
습성은 문득 낯선 얼굴


이후는 다시 이전이 될 수 없다 


킁킁, 이 냄새는 뭔가
―「입덧」 부분


허은실 시인은 이미 「푸른 손아귀」에서 생장/소멸이 미끄러짐(그것은 개인적 차원의 표명이라 이해하더라도 확장하면 인간 그 자체인)을 지나칠 정도로 냉랭한 이미지로 보여 준다. “플라스틱 슬리퍼 한 짝이 맨드라미 옆에서 말라갔다./어른들은 사내애를 건져놓고 담배를 피웠다. 비가 많은 해였다.” 이 배치야 말로 ‘생장/소멸’의 미끄러짐을 제대로 드러낸다. 말라가는 ‘슬리퍼 한 짝’과 피워 문 ‘담배’는 종국적으로 소멸을 향해 가면서도 순간의 사건과 의미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는 존재들의 한계를 함축적으로 드러낸다. 즉 삶은 늘 죽을지 모른다는 협박 아래의 순간인 것이다. 이 긴장이 놀이로 전환하는 것은 ‘생과 사’가 순간적으로 밀착하는 것일 텐데 아마 ‘출산’이 아닐까.
시인은 이 순간, 즉 극도의 긴장을 일종의 놀이(시인이 상상력이 아니라 다른 무슨 놀이를 한다는 것을 잘 이해 못하기에)로 치환置換한다. “별을 낳기 위해/중력을 거부해야 하므로/소화되지 않는 말이/밑구녕이 거꾸로/치밀어 올라오고” 그렇다. 아주 지치도록 들었다. 우리는 모두 별이 자식이고 별을 낳는다고. 시인은 그 사실을 환기하는 게 아니고, 그런 ‘소화되지 않는 말“을 제 자리에 돌려놓고 ”들썩이는 치열/는 나로부터 멀다“는 인식을 ’말‘의 자식으로 게워내기 위해 ’입덧‘을 한다. ”이후는 다시 이전이 될 수 없다“. 니르바나를 희망해도 우리 앞엔 단 한 순간의 변곡점만 남았다. 사실을 인정하는 이 자세가 섣부른 초월에 몸을 던지는 것보다 낫지 않을까. 허은실 시인은 어려운 질문을 아름답게 던지고 있다.


백인덕 1991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끝을 찾아서』, 『한밤의 못질』, 『오래된 약』, 『나는 내 삶을 사랑하는가』, 『단단斷斷함에 대하여』, 『짐작의 우주』. 저서 『사이버 시대의 시적 상상력』 등. 아라문학 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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