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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회 리토피아문학상 수상자에 남태식 시인이 선정되었다.


수상작 '몽상가들의 마을' 외 5편


약력

2003년 리토피아로 등단, 시집 속살 드러낸 것들은 모두 아름답다, 내 슬픈 전설의 그 뱀.



<수상작품>

몽상가들의 마을 외 5편



몽상가들의 마을에서는 몽상이 비처럼 음악처럼 또 신화처럼 흐른다.


신화는 데카메론의 시절 수세기동안 내와 강과 바다를 넘나들며, 빈번한 급사 객사 과로사로 한 대륙을 휩쓸어 인적 드문 마을로 새 판 짜던 토스트.


도시에서 세차게 일어난 신화는 하수구를 거쳐 운하를 타고 시골과 숲과 사막까지 걷잡을 수 없이 퍼진다.


신화에 자발적으로 감염된 몽상가들, 쥐 먹은 토스트를 삼키고 미처 봄 오기도 전에 공든 탑 부수고 나가 봄날 꽃노래에 취한다.


신화는 이제 몽상가들 마을의 최선의 주식.


신화에 얹는 아빠의 손맛으로는 부자와 성공이 단연 으뜸.


몽상가들은 부자와 성공을 곁들인 신화 식탁으로 온 몸 다 밀어 한껏 줄기를 뻗는다.


가난의 맵고 쓴 맛 씹든 씹지 않든 신화 토스트 전염에 적극 자원한 광신화 바퀴들, 부자와 성공의 광고판을 높이 달고 이리저리 행을 걸치며 우물우물 빠르게 말 굴리며 달리는 밤.


신화 토스트 뼈 속속 침투시킨 몽상가들, 봄여름가을 부지런히 잎 주고

꽃 주고 열매 주고도 깊은 잠에 드는 겨울마저 깨워 쉴 사이를 잊는다.


온 줄기에 주렁주렁 살과 피를 태우는 조팝꽃등 달고, 슬쩍 연을 걸친 부자와 성공의 신화 문장 틈에서 덧쌓이는 피로 맨몸으로 견디며 억억, 틔는 열꽃 밤새 터뜨린다.






양치기



이 양치기는


아흔아홉 마리 양들을 들판 가운데 버려두고

한 마리의 잃은 양을 찾는

착한 양치기


붉은 안개를 몰고 다니는

노을을 등진 늙은 양치기


(근대화양치기친일양치기 반공양치기사대주의양치기 신자유주의양치기시장만능싹쓸이양치기 자유민주주의양치기역사망각노예육성양치기......)


수시로 붉은 안개 속에 얼굴을 감추고

이념의 모자를 바꾸어 써도

모자 아래의 이마는 늘 탐욕으로 번지러워

근본은 전혀 바뀌지 않는


1%


기득권자


들판 가운데 버려둔 아흔아홉 마리 양들의 둘레에 울타리를 치고

잃었다는 한 마리의 양까지 끝끝내 찾아서 가두네






복제



이 강에서 투전을 벌여 보물을 낚은 자들은

다 먹튀다


먹튀들이 낚시를 던지고 있다

장미꽃잎들을 흩뿌리며 투전판을 늘리고 있다

애초의 속셈대로다


저 장미꽃잎들!

어김없다

낚싯밥이다


늘린 투전판에서 보물을 낚는 자들도

여전하다 언제나

그 먹튀다


남은 것은 모두

무덤이다


생명의 물을 정화하다 투전으로 밀려난

강모래들로 쌓아올린 모래무덤이다

속이 빈 깡통 같은, 그런,


무덤이다






아니오



무덤의 나라에는 아니오가 없다


아니오가 없는 무덤이

허물고 쌓고 허물고 쌓는 것들은

모두 무덤


무덤들 위에 새로 피우고 돋우는

꽃들도 무덤

풀들도 무덤


무덤이 된

꽃들이 슬프다

풀들이 슬프다


아니오가 없으면

아니오가 없는 나라도 무덤

그 나라의 산천이 모두 무덤


아니오가 없는 무덤이 슬프다

아니오가 없는 나라가 슬프다

그 나라의 산천이 모두 아프다






벗다



무덤에 안 드니 경칩 지난 눈바람도 무지 매섭다. 골골 휘저으며 눈발로 등성이를 내리 뭉개니 시려 가슴을 웅크려 오므린다. 눈밭에 몸을 숨기니 겨울은 아무래도 못 건넌다.


무덤에 드니 한겨울의 칼바람도 다소곳하다. 찬 기운 오래 일도록 밤새 빚은 눈의 뼈 굳히지 않고, 잠깐 든 햇살에도 모두 삭힌다. 무덤에 몸을 묻으니 겨울은 아무튼지 건넌다.


무덤에 들어 겨울을 건너니 느닷없는 봄이 오고, 드디어 무덤마저 다 벗는다.






오늘은



오늘은 꿈이 자살처럼 솟는 날이다

오늘은 꽃이 기절처럼 터지는 날이다

오늘은 봄이 비명처럼 틔는 날이다


오늘은 저 먼 길의 끝을 당겨

우뚝, 절벽을 세운 날이다

짧고 뜨거운 봄 여름 가을 꿈결인 듯 지나쳐

차고 거친 긴 겨울을 문득, 덥석, 안은 날이다

돈에 휩쓸려 애써 잊은 만성두통을 찾은 날이다


우리 미처 잠을 다 깨지 않은 날이다

우리 미처 봉오리를 다 빚지 않은 날이다

우리 미처 화음을 다 맞추지 않은 날이다

당긴다고 당겨온 길의 끝이 벼락처럼 꺼져

오가는 길 모두 돈처럼 가르는 날이다


오늘은 잠도 꿈도 아닌 잠에서 깨어

다시 깊은 잠을 자는 날이다

올곧은 꿈을 꾸는 날이다

사철 숨과 숨을 이어 환하게 터지는 꽃

다시 씨앗을 뿌리는 날이다

오래 함께 환호하며 부를 봄노래

다시 목청을 가다듬는 날이다


꿈이 이미 자살처럼은 솟지 않는 날이다

꽃이 이미 기절처럼은 터지지 않는 날이다

봄이 이미 비명처럼은 틔지 않는 날이다

돈으로 일찍 늙힌 민주 회춘하여

오늘은 굽은 머리카락 허리 펴는 날이다 이런,

생각을 자꾸 해보는 날이다





<심사평>


변하지 않으면서 변할 수 있다. 흔들리지 않으면서도 충분히 변화할 수 있다. 우리는 이런 점을 남태식 시인에게서 본다. 사람은 변화를 의식할 때에 오히려 주변을 부담스럽게 만든다. 남태식 시인은 리토피아 창간 뿌리에서부터 리토피아를 지켜온 시인이다. 리토피아를 지탱하는 커다란 나무가 되었다. 변함 없는 심성과는 달리 시에 있어서는 끊임없이 변화를 추구하는 시인이다. 작품 활동도 휴식기 없이 왕성하게 지속하고 있는 시인이다. 지난 2011년에도 그는 적지 않은 작품을 발표했다. 발표하는 작품마다 타작이 없다. 비록 리토피아문학상이 이제 시작된 상이라 할지라도, 그래서 별다른 힘이 되어주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이제 그가 리토피아와 함께 한국시단의 거목으로 성장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심사위원 고명철, 장종권(글)





<소감>

무덤의 시를 씁니다


오랫동안 무덤가를 서성이고 있습니다. 무덤가에서 술을 마시고, 노래를 하고, 꿈을 꾸고, 시를 씁니다. 애써 무덤가를 떠나라, 떠나라, 언제나 속삭이는 삶을 위하여 언제나 무덤가를 떠나지만, 또 번번이 다시 무덤가로 돌아와 술을 마시고, 노래를 하고, 꿈을 꾸고, 시를 씁니다. 느껴서 떠나고 돌아오기도 하지만, 모르는 사이 떠났다가 돌아오기도 합니다. 이 무덤가에서 마시는 술은 무덤의 술입니다. 이 무덤가에서 부르는 노래는 무덤의 노래입니다. 이 무덤가에서 꾸는 꿈은 무덤의 꿈입니다. 해서 이 무덤가에서 쓰는 시는 당연 무덤의 시입니다.

언제부터 이 무덤가에 머물렀을까, 언제부터 이 무덤가를 떠났다가 돌아오기를 반복했을까, 생각해봅니다. 두 번째 시집인 <내 슬픈 전설의 그 뱀>을 내고 난 뒤인 것 같기도 하고, 그 이전 내기로 결정한 때쯤인 것 같기도 합니다. 아님, 어쩌면 처음부터 이 무덤가에서 태어나, 한 번도 이 무덤가를 떠나 본 적이 없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그 이전 무덤가에 대한 기억과 반복해서 무덤가를 떠나고 돌아온 기억이 없는 것은, 애초부터 없는 기억이 아니라 애써 지운 기억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지운 기억은 지운 기억일 뿐 어떠한 경우에도 없는 기억은 아닙니다.

오늘도 무덤가를 서성이고 있습니다. 서성이며 시를 씁니다. 몸은 때로 이 무덤가를 착각처럼 떠나 바쁘게 세상을 휘젓고 다니는 시간에도, 시만은 고집스럽게 이 무덤가를 서성이게 하고 시를 씁니다. 무덤의 술을 마시며, 무덤의 노래를 하며, 무덤의 꿈을 꾸며, 시를 씁니다. 당연 무덤의 시를 씁니다. 무덤의 꿈이 되는, 무덤의 노래가 되는, 무덤의 술이 되는, 무덤의 시입니다. 이 무덤가에서는 무덤의 술이 진정입니다. 이 무덤가에서는 무덤의 노래가 진정입니다. 이 무덤가에서는 무덤의 꿈이 진정입니다. 해서 이 무덤가에서는 당연 무덤의 시가 진정입니다.

10여년이 넘는 문학판에서의 대부분의 시간을 리토피아와 함께 했습니다. 상을 준다기에 누가 염치를 이야기해도 모른 체 하기로 하고 덥석 받습니다. 앞으로 더 열심히 하라는 격려로 받습니다. 앞으로의 길을 계속 더 함께 가자는 악수로 받습니다. 고맙습니다./수상자 남태식





<심사평>

시적 몽상의 힘에서 길어올린 시적 풍자

― 남태식의 최근 시 세계

고명철



남태식은 그의 첫 시집 <내 슬픈 전설의 그 뱀>(리토피아, 2009)에서 묵시록적 현실의 ‘사이’에서 솟구치는 시적 진실을 노래한 바 있다. 그는 비루한 현실‘들’의 틈새에서 숨죽이고 있는 작고 사소한 것들에 대한 시적 관심을 거둬본 적이 없을 뿐만 아니라 그 현실‘들’의 틈새에서 숨어 있는 세계악(世界惡)에 눈을 감은 적도 없다.

그의 시 세계 전반을 감싸고 있는 예의 시적 윤리는 곧 그의 시의 미학이자 시의 정치성이기도 하다. 그런데 남태식의 최근 시 세계에서 주목해야 할 게 있다. 언제부터인가, 한국 시단에서 사그라들고 있는 시적 풍자의 면모가 그의 시편에서 유감없이 펼쳐지고 있다.


이 양치기는

아흔아홉 마리 양들을 들판 가운데 버려두고

한 마리의 잃은 양을 찾는

착한 양치기

붉은 안개를 몰고 다니는

노을을 등진 늙은 양치기

(근대화양치기친일양치기 반공양치기사대주의양치기 신자유주의양치기시장만능싹쓸이양치기 자유민주주의양치기역사망각노예육성양치기……)

수시로 붉은 안개 속에 얼굴을 감추고

이념의 모자를 바꾸어 써도

모자 아래의 이마는 늘 탐욕으로 번지러워

근본은 전혀 바뀌지 않는

1%

기득권자

들판 가운데 버려둔 아흔아홉 마리 양들의 둘레에 울타리를 치고

잃었다는 한 마리의 양까지 끝끝내 찾아서 가두네

― 「양치기」 전문


이솝우화의 하나인 양치기 이야기를 한국사회에 빗대어 패러디한 시적 풍자로서 손색이 없다. 우리는 이 양치기의 수선스런 행위를 보면서 양치기가 어떤 역할을 충실히 맡고 있는지를 다 안다. 양을 치는 그는 겉으로 볼 때, 자신의 임무를 매우 충실히 수행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문제는 그리 간단하지 않다. 시인이 풍자하고 있듯, 이 양치기가 치는 양들은 한국사회의 부정적 양태들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는 것들―근대화, 친일, 반공, 사대주의, 신자유주의, 역사망각, 노예 육성 등인바, 무엇보다 섬뜩한 것은 이 모든 것들에 대한 감시와 관리는 다름이 아니라 한국사회의 최상층 1% 기득권자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양치기는 누구의 이익을 대변하고 있다는 말인가. 그래서 그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어떠한 것들을 감시 ‧ 관리하고 있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이 양치기는 또 누구라는 말인가……. 이러한 일련의 물음들이 연쇄적으로 꼬리를 문다. 시인은 이 심문의 과정에 우리를 동참시키고는, 이러한 부정적 작태에 대해 신랄한 풍자의 웃음을 자아낸다.

여기에는 지금, 이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위정자들에 의해 실행되고 있는 일들이 상식을 갖고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비판적 웃음을 참을 수 없도록 하기 때문이다. 삼척동자도 개탄스러워할 만한 일들을, 정부는 어쩌면 그토록 뻔뻔하게 비논리적 기만의 수사를 통해 억지로 밀어붙이려고 하는지,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것 투성이다. 이러한 어처구니없는 현실을 남태식은 시적 풍자로 대응을 하고 있는 셈이다. 4대강 개발에 대한 또 다른 시적 풍자를 음미해보자.


이 강에서 투전을 벌여 보물을 낚은 자들은

다 먹튀다

먹튀들이 낚시를 던지고 있다

장미꽃잎들을 흩뿌리며 투전판을 늘리고 있다

애초의 속셈대로다


(중략)


남은 것은 모두

무덤이다

생명의 물을 정화하다 투전으로 밀려난

강모래들로 쌓아올린 모래무덤이다

속이 빈 깡통 같은, 그런,

무덤이다

― 「복제」 부분


정부의 4대강 개발에 대한 비판은 정부의 행정 행위에 대한 막무가내식 부정이 결코 아니다. 인간중심주의에 대한 비판, 토목지상주의에 대한 비판, 부동산 투기에 대한 비판 등이 뒤엉킨, 무엇보다 개발 이익을 둘러싼 복마전(伏魔殿)으로 인한 사회적 대립 ․ 갈등 ․ 분열로 인간의 삶이 피폐해질 것이 불을 보듯 뻔하기 때문이다. 인간과 자연이 공존 ․ 상생한다는 것이 토목지상주의에 대한 그럴듯한 한갓 기만적 수사에 불과하다는 것을 조금만 눈여겨본다면 쉽게 알 수 있다. 시인은 뚜렷이 응시한다. 4대강 개발터가 투전판과 다를 바 없고, 그곳에는 오직 돈을 벌기 위한 데 혈안이 된 ‘먹튀들’의 이해관계만이 난무할 따름이다. 하여, 시인은 이러한 곳을 ‘삶터’가 아닌 ‘무덤’으로 인식한다. 이것은 4대강 개발이란 국책사업이 강을 살리는 개발이 아니라 도리어 강에 기반한 뭇존재들의 가치를 모두 경제적 가치로 환원시키면서 경제적 이해관계로만 파악하는 반생명적 개발의 성격을 갖기 때문이다.

특히 ‘무덤’이란 시적 메타포가 예사롭지 않다. 남태식 시인에게 지금, 이곳은 ‘무덤’으로 은유화된 세계다.


무덤의 나라에는 아니오가 없다

(중략)

아니오가 없으면

아니오가 없는 나라도 무덤

그 나라의 산천이 모두 무덤

아니오가 없는 무덤이 슬프다

아니오가 없는 나라가 슬프다

그 나라의 산천이 모두 아프다

― 「아니오」 부분


‘무덤’으로 이뤄진 세계에서는 ‘아니오’라고 말할 수 없다. 그렇다. 생각해보면, 그럴 수밖에 없을 터이다. 온통 죽음의 사위로 에워싼 세계, 살아 있음이 없는 세계, 이러한 세계에서 부정의 입장은 찾아볼 수 없다. 살아 있다는 것은 움직임이 있다는 것이며, 움직임이란 서로의 어떤 관계가 있어야 하는 것이며, 그 관계란 서로 극성을 이루고 있는 것들 사이의 모종의 그것이 아니던가. 따라서 ‘아니오’가 없다는 것은, 이 세계를 이루는 움직임의 원인을 제거하는 것인바, 그것은 곧 생명을 빼앗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생각만 해도 끔찍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세계에서는 살아도 살아 있는 게 아닐 것이다.

이처럼 남태식 시인의 시적 풍자는 비판적 웃음이 매우 인상적이되, 거기에는 세계에 대한 비관주의적 그늘이 짙게 드리워져 있다. 그런데, 분명히 구별해야 할 ‘무덤’의 은유가 있다. 남태식 시인의 시적 윤리와 시적 정치성에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이 암울한 세계를 견뎌내는 시적 인고에 깃든 시적 희망이다.


무덤에 들어 겨울을 건너니 느닷없는 봄이 오고, 드디어 무덤마저 벗는다.

― 「벗다」 부분


오늘은 잠도 꿈도 아닌 잠에서 깨어

다시 깊은 잠을 자는 날이다

올곧은 꿈을 꾸는 날이다

사철 숨과 숨을 이어 환하게 터지는 꽃

다시 씨앗을 뿌리는 날이다

오래 함께 환호하며 부를 봄노래

다시 목청을 가다듬는 날이다

― 「오늘은」 부분


몽상가들의 마을에서는 몽상이 비처럼 음악처럼 또 신화처럼 흐른다.

― 「몽상가들의 마을」 부분


남태식 시인에게 ‘무덤’은 또 다른 은유의 세계다. 무덤은 겨울을 견뎌내 봄을 맞이해야 하는 통과제의적 장소로 기능을 한다. 이곳에서 뭇존재는 죽음의 형식을 띤 채 머지않아 도래할 삶의 형식을 준비한다. 이곳에서 죽음의 형식은 “꿈을 꾸는 날”이고 “목청을 가다듬는 날”인 셈이다. 그런데, ‘무덤’에 대한 이 또 다른 은유의 세계가 자연스레 이해되는 것은, 시인이 이 모든 것을 ‘몽상’하기 때문이다. 시인은 “비처럼 음악처럼 또 신화처럼 흐”르는 ‘몽상’을 하는 특권을 지닌 존재다. 시인은 “몽상가들의 마을”에서 ‘무덤’을 영원한 죽음의 세계로 인식하는 게 아니라 또 다른 삶의 경계로 옮아가는 ‘비의적 성소(the holy place of mistique)’의 가치를 부여한다.

남태식 시인의 ‘몽상’이 미더운 것은 현실과 절연된 상상의 허방에 갇혀 있지 않고, 현실과의 관계 속에서 시적 상상력의 힘을 견실히 가다듬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시적 몽상이 한층 더욱 웅숭깊어진 시 세계를 이뤄나갈 것으로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