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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기

길 위에서 외 9편

 

 

처음엔 꽃 무더기 하나 저쯤 있어 들어섰건만 길 끝 아스라하네

시도 때도 없던 가파름도 잦아들었고 이젠 발자국소리 들으며 가네

이 길 끝은 어떻게 생겼을까? 길 끝으로 자꾸 나를 놓아 보내네

다시 또 거기, 꽃 무더기 하나 있어 다른 길 내게 손짓할런지

 



 

 

밀어密語

 

 

사랑이란

골백번 사랑한다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 사람의 쓸쓸한 시간 속으로 마침내 걸어 들어가는 것이다

그 곳에 욕심 없는 작은 집을 짓고

서로를 향해 한 것 크고 겸손한 창을 다는 것이다

항시 불이 켜져 너무 환한 그 집

마침내 그렇게 서로의 밝은 언어가 되는 것이다

그 언어로 꿈을 꾸고 맑은 생각이 되고

온전히 그렇게 누구의

미래가 되는 것이다

 

 



 

추정秋情

 

 

도대체 어느 작은 우주의 마음자리 저리 단출해져

마른 풀숲엔 말간 목청만 남아

소리꽃을 피우나

까만 밤 산재한 꽃들 사이

우수수, 제 울음에 겨워지는 사람들

나는 너무 죄가 많아서

덩달아 핀다, 덩달아 진다

온밤 내내 귀만 남아

피고

진다

 

 



 

아산장

 

 

창밖 ‘아산장’

붉은 네온사인을 보며

눈귀코입, 내 몸이 공연히 바쁘다

어디서부터 지고 왔는지

등짐들을 부리느라 한바탕 난리다

끈적거림찝질한물맛교성여인숙밤차기적소리곰팡이냄새소주대전역순대태종대청량리…….

유리관 위에 차곡차곡 눕는

내 業

 



 

 

아이가 운다

 

 

어쩌자고 아이가 또 운다

무엇을 읽었는지 창밖엔 회초리 같은 바람이 불고 우―우 눈들이 몰려간다 아이는 어둠 너머로 메아리 하나를 만든다

친구 S가 달려오고 따라주는 술 한 잔의 통속함 그 진저리

아이는 다시 새근새근 잠이 들었다

 

 



 

그림자

 

 

追放者, 아직도 좁은 이 나라를 떠나지도 못하고 이승의 빛깔로도 서지 못하는 은밀한 당신은, 진화되지 못한 내 어둠에 묶여 울음 우는 이무기

당신이 심술을 떨면 이 세상엔 뽀얀 안개가 끼고 눈 큰 아이는 또 길을 잃는데

언제쯤 이 나라 햇빛 속으로 다시 現身할 것인가?

창문 하나 열어 놓는다

 

 



 

사과

 

 

망가진 내 심장 대신에 아주 빨갛고 예쁜 사과를 하나 넣었어요 그런데 파랗던 손톱에 피가 도네요 멈추었던 시계바늘이 움직이네요

별일 다 있다 싶은데 전부 괜찮은 것은 아녜요 가슴에 난데없이 치자빛 노을이 뜨네요 아리다기에는 너무 빛깔이 곱고, 빛깔이 곱다기에는 너무 아린

페시미스트에게 차려준 마지막 성찬이라 생각할래요

잘 생각해보니 그 사과는 내가 어려서 갖고 싶어했던 사과인 것 같아요 노을은 그때 눈물 그렁거리며 바라보던 하늘이었던 것 같고요

 

 

 



사리大滿朝

 

 

바다는 출렁댄다

바다는 출렁대야 한다

그런데, 그런데도

마침내 立秋

초하루 어둔 밤

悔恨의 둑을 넘어서

그 바다는

밤새워 출렁거렸다

끝없이, 끝없이

출렁거려야 했다

 

 



 

바코드

 

 

한 줄로 늘어선 굵고 가는 선들

그렇게, 몇 개의 막대기로

아주 간단히 읽혀지고

혹 지워지지나 않을까

노심초사 하는 사람들

스윽 당신을 긁는다

스윽 나를 긁는다

계속 에러다

―나는 도대체 누구지?

 

 

 



幻·2

―어떤 민박

 

 

그녀

허물처럼 벗어 놓고 간 방

그녀가 누웠던 침대에

몸을 눕힌다

그녀가 앉았던 자리에서

거울을 본다

그녀가 서 있던 자리에서

바다를 본다

지금 이 시간에서 하루만 뺀다면

하나로 포개어지는 시간

그녀와 나

맨 어깨 닿은 채

노을 진 수평선

같이 바라보고 있을까?


 

 

 

심사경위

첫 번째의 매듭으로 삼으며/매듭은 까닭이 있어 만드는 것이다. 매듭은 풀어야할 의미가 있을 때에는 당연히 풀어야 하는 것이지만, 필요할 때에는 또 마땅히 만들어야 한다. 이때의 매듭은 간이역과 같은 것으로 줄기찬 흐름을 잠시 멈추고 호흡을 가다듬는 중요한 역할을 할 수도 있다. 그 매듭으로 우리는 거리와 시간을 읽고 정리하고 새로운 출발을 하기도 한다. 리토피아문학상의 시작은 일종의 리토피아의 호흡을 고르기 위한 매듭이라고 볼 수가 있다.

지난 10년 동안 리토피아 가족들은 정말 열심히 글을 써왔다. 작품만 열심히 쓴 것이 아니고 문단에서의 활동도 왕성하게 벌여왔다. 누구에게나 신뢰받는 인격자로, 유행에 편승하지 않는 치열한 문학정신으로, 세상이 알아주지 않아도 이에 섭섭해 하지 않고 자신의 길만 열심히 걸어왔다. 이들에게 우리들의 상이 필요한 이유이다.

본 상은 리토피아의 가족으로서 지난 1년 동안 여러 문예지에 발표한 작품들을 검토하여 그 작품성이 가장 우수한 분을 선정하게 된다. 또한 그것이 리토피아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임은 두 말을 할 필요가 없을 것이므로 본 상에는 이에 대한 감사의 의미도 담겨지게 된다.

김승기 시인은 지난 1년뿐만이 아니라 그 동안 끊임없이 자신의 세계를 추구하는 독보적인 작품을 계속 발표해 왔으며, 이로 인해 한국 시단에서 자신의 자리를 분명하게 확보함과 동시에 리토피아의 위상을 한껏 높여주었다. 이 작은 상이 김승기 시인에게는 비록 영광된 상이 되지 못한다 하더라도 리토피아는 지난 10년의 피와 땀을 소중하게 여기며 반드시 돌아보아야할 중요한 첫 번째 매듭으로 삼고자 한다.

심의위원 고명철, 장종권(글)

 

 

수상소감

환자를 통해 나의 내면 들여다보아


나의 젊은 날은 참 황량했다. 지칠 줄 모르던 권태와 고독감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완행열차에 몸을 싣고 어두운 창밖을 바라보는 것이었고, 내 발길이 끌고 간 것은 죽도시장, 자갈치 시장 등 여러 시장의 시끄러움 속이었다. 쓴 소주를 들이키다 시장 아주머니들의 치열한 모습에서 한껏 창백해진 내 삶의 의지를 수혈 받곤 했다. 그 때 만난 것이 詩다. 나의 내면에 꿈틀대는 것들을 밤새워 써내려 가는 것으로 새벽녘엔 한 편의 시를 받아들 수 있었고 그 때서야 나는 긴 잠에 빠져 들곤 했다. 그 결과물이 첫 시집 <우울감의 정체>이고, 그 때의 시어들은 당연히 1인칭에 갇혀 있다.

그 후 나는 정신과 의사가 되어 있었고, 참 많은 부류의 사람들을 만났고, 무수한 이야기들을 통해 간접경험을 할 수 있었다. 내가 본 세계, 저쯤에 서있는 2인칭, 佛家용어로 내가 觸한 法 名色들. 그 것들에 대한 내 業相을 불러오는 것은 즐거움이자 형벌이었고, 그 것들을 두 번째 시집 <세상은 꼭 한 모금씩 모자란다>에 剝製시켰다. 정신과 의사의 가장 큰 혜택은 환자를 통해 자신을 바라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들에 비친 나의 내면을 시로 하나둘 정리할 수 있었고, 그 언어들은 이제 하루 빨리 치워버려야 할 것들이 되어 탈고를 기다리고 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며 가치관이나 도덕이란 이름으로 假裝되어 나를 강제하던 페르조나Persona는 이제 거의 사라졌다. 그들이 힘을 잃은 하루는 참 조용하고 밋밋하다. 그 떠들썩하던 감정을 수반한 표상들의 들끓음이 욕망이리라. 지금 그 표상들에 대한 연모는 아주 미약해져 나의 행동은 자주 연기되고 끊어지지만 일상은 너무나 평온하다.

감사할 뿐이다. 나를 이곳으로 인도한 밤기차, 자갈치 아즈매, 나를 거쳐 간 환자들, 그리고 詩, 그 詩와 같이한 리토피아! 내 좋아 걸어 온 길인데 상까지 주신다니 황공할 뿐이다./수상자 김승기



<작품해설>

|해설|

성찰의 미와 사랑의 가치

―김승기의 시적 도정

고명철|문학평론가




김승기 시인의 시를 나지막이 읊고 있노라면 망각하고 있던 ‘나’를 마주한다. 하릴없이 앞만 보며 내닫던 자신의 속도를 늦추고, 아니, 정지한 채 ‘나’를 대상화한다. 좀처럼 대상화하기 힘든 ‘나’를 마치 타자인 양 일정한 거리를 두고 곰곰 성찰하게 된다. 그러는 동안 그토록 낯익던 ‘나’는 언제 그랬냐는 듯 이물스러운 존재로 바뀌어 있다. 말하자면, ‘나’는 ‘또 다른 나’와 조우하게 된다.


처음엔 꽃 무더기 하나 저쯤 있어 들어섰건만 길 끝 아스라하네

시도 때도 없던 가파름도 잦아들었고 이젠 발자국소리 들으며 가네

이 길 끝은 어떻게 생겼을까? 길 끝으로 자꾸 나를 놓아 보내네

다시 또 거기, 꽃 무더기 하나 있어 다른 길 내게 손짓 할런지.

―「길 위에서」 전문


‘나’가 ‘또 다른 나’를 만나는 일은 쉽지 않다. 도대체 누가 ‘나’를 “길 끝으로 자꾸” “놓아 보내”고 있을까. ‘나’는 “꽃 무더기 하나”의 매혹에 이끌려 들어선 길인데, 길을 가다보니 길 끝에 서 있고, “다시 또 거기, 꽃 무더기 하나 있어 다른 길”로 들어서도록 한 이유는 무엇일까. 길 끝의 생김새가 궁금하여 길 끝으로 가지만 길 끝은 결코 보이지 않는다. 대신 ‘나’는 ‘또 다른 나’의 존재를 발견하게 된다. ‘저’라는 관형사와 ‘거기’라는 부사가 내포하고 있듯, ‘나’를 길 끝으로 인도한 것은 ‘나’와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는 ‘또 다른 나’인바, ‘나’는 비로소 길 위에서 ‘나’를 대상화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모든 게 전산 시스템으로 체계화된 일상 속에서 ‘나’를 대상화하는 일은 썩 유쾌한 것은 아니다. ‘나’의 고유성과 특이성은 일정한 원칙과 계량화에 의해 수치로 정리돼 관리된다. 만약 계량화돼 있지 않다면, ‘나’는 사회의 일탈자로서 그 사회로부터 아예 추방되거나 엄혹한 관리와 감시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정비된 사회의 시스템 안에서 만족해야 한다.


한 줄로 늘어선 굵고 가는 선들

그렇게, 몇 개의 막대기로

아주 간단히 읽혀지고

혹 지워지지나 않을까

노심초사 하는 사람들

스윽 당신을 긁는다

스윽 나를 긁는다

계속 에러다

―나는 도대체 누구지?

―「바코드」 전문


“한 줄로 늘어선 굵고 가는 선들”, 즉 바코드는 상품에만 부착되지 않고, 이제 인간 개개인을 식별해야 하는 식별표로써 그 기능을 충실히 담당하고 있다. 만약, 식별표가 없거나, 식별표가 제대로 감지되지 않으면, 일상의 불편함은 물로 심지어 정상적 일상을 누리지 못할 수도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바코드가 “혹 지워지지 않을까” 걱정한다. 이제 바코드는 사람들의 존재 그 자체나 다름이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다가 바코드 혹은 바코드를 식별하는 시스템에 이상이 생기면 사람들은 두려워한다. 일상에서 자신이 마치 고장이 난 것처럼 그래서 일상 밖으로 퇴출될 것과 같은 공포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김승기 시인은 우리에게 긴급한 전언을 타전한다. 이렇게 바코드로 대상화되고 있는 “나는 도대체 누구지?”라고.

그래서인지, 김승기 시인이 집요하게 탐문하고 있는 시적 과제는 (탈)근대 사회에서 익명으로 부호화되고 있는 ‘나’가 아니라 삶의 실재로 숨쉬고 있는 ‘나’에 대한 성찰이다. 김승기의 ‘나’에 대한 시적 성찰에서 흥미로운 것은 ‘창(문)’을 매개로 한 시작詩作이다. 가령, 다음과 같은 시구를 보자.


무엇을 읽었는지 창밖엔 회초리 같은 바람이 불고 우―우 눈들이 몰려간다 아이는 어둠 너머로 메아리 하나를 만든다

―「아이가 운다」 부분


창밖 ‘아산장’/붉은 네온사인을 보며/눈귀코입, 내 몸이 공연히 바쁘다

―「아산장」 부분


追放者, 아직도 좁은 이 나라를 떠나지도 못하고 이승의 빛깔로도 서지 못하는 은밀한 당신은, 진화되지 못한 내 어둠에 묶여 울음 우는 이무기

당신이 심술을 떨면 이 세상엔 뽀얀 안개가 끼고 눈 큰 아이는 또 길을 잃는데

언제쯤 이 나라 햇빛 속으로 다시 現身할 것인가?

창문 하나 열어 놓는다

―「그림자」 전문


(문)을 경계로 안과 밖의 세계가 나뉜다. 창 밖의 세계는 “회초리 같은 바람이 불고 우―우 눈들이 몰려”가면서 어둠 속에서 아이의 울음이 들리고(「아이가 운다」), 타지를 찾은 이방인을 유혹하는 붉은 네온사인이 꺼지지 않는 곳이고(「아산장」), 어둠 속에서 호시탐탐 용으로 승천할 날만을 기다리는 이무기의 울음이 지배하는 곳이다(「그림자」). 말하자면, 창 밖의 세계는 어둠과 욕망으로 그득 찬 곳으로, ‘나’에게는 혼돈의 세계 그 자체이다. ‘나’의 성찰이 진정성을 보증하기 위해서는 이 혼돈의 세계와 마주해야 한다. 어둠과 욕망을 회피하는 게 아니라 그것을 있는 그대로 응시하여 그 모든 것을 넉넉히 감싸안음으로써 종요로운 ‘나’의 세계를 이뤄내야 한다. 그 과정에서 ‘나’와 ‘또 다른 나’는 서로에게 상호주관적 존재의 가치로 자연스레 대상화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성찰의 가치’가 지닌 아름다움이 아닐 수 없다.


도대체 어느 작은 우주의 마음자리 저리 단출해져

마른 풀숲엔 말간 목청만 남아

소리꽃을 피우나

까만 밤 산재한 꽃들 사이

우수수, 제 울음에 겨워지는 사람들

나는 너무 죄가 많아서

덩달아 핀다, 덩달아 진다

온밤 내내 귀만 남아

피고

진다

―「추정秋情」 전문


혼돈의 세계를 배척하는 게 아니라 그것의 속성을 자연스레 끌어안는 것이야말로 ‘나’는 과거의 ‘나’가 아니라, 새롭게 거듭 난 ‘또 다른 나’로서 자기갱신의 참모습을 보인다. 여기서 갱신하는 ‘나’는 “작은 우주의 마음자리”를 지닌 채 “말간 목청”으로 꽃을 피운다. 생명을 피워낸다. 물론, 이 꽃은 모든 생명체들이 그렇듯 영원한 생명을 간직하고 있지 않다. 꽃은 질 것이고 다시 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 피고 지는 꽃의 생명의 소리에 무심하지 않을 것이다. “온밤 내내 귀”를 쫑긋 세워 이 작지만 결코 작지 않은 생명의 장엄한 순간을 경청할 것이다. 어쩌면 이 경청하는 행위가 바로 시인의 숙명인지 모를 일이다. 피고 지는 사이 아름다움의 경이는 우리도 모르게 일어나는데, 시인은 그 경이의 순간을 나포해야 하기 때문이다.


사실, 나포해야 할 게 이것뿐이겠는가.

그녀가 누웠던 침대에

몸을 눕힌다

그녀가 앉았던 자리에서

거울을 본다

그녀가 서 있던 자리에서

바다를 본다

―「幻·2」 부분

그 바다는

밤세워 출렁거렸다

끝없이, 끝없이

출렁거려야 했다

―「사리大滿朝」 부분


시인은 어떤 민박에서 여인이 머물렀던 흔적을 세심히 추적하면서 여인과 함께 했던 시간의 아름다움을 떠올린다(「幻·2). 그리고 만조滿朝 시기 출렁거리는 어둔 밤의 바다에 투영된 욕망의 역동성을 포착한다(「사리大滿朝」). 어떤 구체적 사연 때문에 그녀의 흔적을 이토록 집요하게 추적하고 있는지, 무슨 “悔恨”이 얼마나 깊었으면 출렁거리는 바다에 주목하는지, 위 시를 통해서는 잘 알 수 없다. 다만, 우리가 눈여겨 보아야 할 것은 예의 순간이 아름다움의 경이를 온축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김승기 시인이 이러한 시적 도정 속에서 궁극적으로 도달하고 싶은 시의 경지는 무엇일까. 달리 말해 그가 획득하고 싶은 시의 언어는 어떠한 것일까. 그가 시를 쓰는 궁극의 이유는 무엇일까.


사랑이란

골백번 사랑한다 말 하는 것이 아니다

그 사람의 쓸쓸한 시간 속으로 마침내 걸어 들어가는 것이다

그 곳에 욕심 없는 작은 집을 짖고

서로를 향해 한 것 크고 겸손한 窓을 다는 것이다

항시 불이 켜져 너무 환한 그 집

마침내 그렇게 서로의 밝은 언어가 되는 것이다

그 언어로 꿈을 꾸고 맑은 생각이 되고

온전히 그렇게 누구의

미래가 되는 것이다

―「밀어密語」 전문


좋은 예술이 성취하고 싶은 궁극의 경지가 ‘사랑’이라는 데 대해 다른 견해를 갖고 있는 자는 없을 터이다. 막상 터놓고 얘기한다면, 지구상의 뭇 예술은 사랑을 제 각기의 방식으로 추구하고 있다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김승기 시인도 예외가 아니다. 그 역시 동서고금의 예술이 궁극적으로 성취하고 싶은 것 중 하나인 사랑의 가치를 중시 여기며, 특히 사랑의 언어를 피워내길 간절히 욕망한다. 그에게 사랑이란, 서로의 외로움 속으로 들어가 그곳에서 “작은 집을 짖고” “겸손한 창”을 달고, 서로를 경계하지 않고 신뢰하여 늘 밝게 비쳐줄 “밝은 언어”로 “꿈을 꾸고 맑은 생각”을 하는 일이다. 서로를 속이는 가운데 거짓 관계가 일상에 팽배해져 진실과 진정성의 가치가 크게 훼손되어서는 곤란하다. 하여, 미의 가치가 전도되어서도 곤란하다.

시인은 간절히 꿈꾼다. 비록 이 꿈이 당장 실현되지는 않으나, 시인은 끊임없는 자기성찰의 시적 도정을 통해 그의 언어가 언젠가 이 꿈을 실현할 미래를 기대한다.



고명철∙1970년 제주 출생. 문학평론가. 저서 <잠못 이루는 리얼리스트>, <문학, 전위적 저항의 정치성>, <지독한 사랑> 등 다수. 고석규비평문학상수상. 현재 광운대 교양학부 교수.